죽기전에 이것만은/ 이해인
독자들에게 감사의 시를 쓸까
한폭의 수채화를 남겨놓을까?
삶이 詩가 되고 그림이 될 수 있게
남은 날들을 겸손하게 살아야지...
며칠간 먼 나라에 다녀왔더니 그 동안 여독이 많이 쌓여서인가 계속 잠이 쏟아진다.
잠자는 이들과 죽은 이들이 어쩌면 그렇게 서로 같은지! 죽음은 그 날짜가 알려지지
않았도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한 구절도 떠올리면서 영영 깨어나지 못하고 긴 잠을 자는
것이 곧 죽음임을 생각한다.
그래서 매일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마다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새롭게 경탄하곤 한다.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의 죽음을/아직 다 슬퍼하기도 전에/또 한 사람의 죽음이 슬픔위에
포개져/나는 할 말을 잃네/나는 이제 울 수도 없네/갈수록 쌓여가는 슬픔을/어쩌지 못해/
삶은 자꾸 무거워지고/이세상에서 사라진 사랑하는 이들/세월이 가도 문득 문득/그리움으로
살아오는 하얀 슬픔이/ 그래도 조금만 가쁨인가 나를 위로하네’ (나의 시 ‘슬픈 노래’ 전문)라고
고백할 만큼 요즘은 눈만 뜨면 안으로 밖으로 수많은 부음을 듣게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가 무덤속에 있는 것이
믿기질 않아 울먹이는 순간도 부쩍 많아졌다.
여러 사람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나서 나 역시 이것저것 물건 정리를 해보고 가상 유언장도
적어보며 아직은 오지 않은 ‘상상속의 죽음’으로 이별연습도 미리 해보지만 어떤 모습으로
나의 삶이 마무리가 될지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평소에 이상적으로 써놓은 글이나 말과 다르게 마무리가 되면 어쩌나 문득 두렵고
걱정이 된 적도 있지만 그래도 일단은 여태껏 행복하게 살았듯이 행복하게 떠나고 싶다.
죽기 전에 수도자로서의 어떤 바람이 있다면 하느님을 향한 나의 수직적인 사랑과 이웃을
향한 나의 수평적인 사랑이 잘 조화를 이루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래도 사랑의 심부름을
잘 하였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그 누구도 함부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않는 아량과 아픈 중에도 밝은 표정을 지닐 수
있는 믿음과 좋은 일에서도 굳은 일에서도 감사를 발견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며 매일을
살고 싶다.
어느 날 고통에 겨워 비록 말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도 온몸으로 ‘주님은 자비를 배푸소서!’
라고 겸손하게 고백하리라.
“일생 동안 사랑하고 사랑받아 행복했습니다. 부족한 저를 많이 참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나의 지인들과 수도공동체에 말하리라.
비록 이것저것 깔끔하게 내가 정리를 다 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따난다 해도 어머니
공동체는 나를 흉보거나 비난하기보다는 넉넉하고 고요한 미소와 사랑으로 감싸줄 거라 믿으니
벌써부터 든든한 마음이다.
혹시 작가로서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무어라고 답할까.
나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다고 믿진 않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아름다운 동화를 꼭 한번 쓰고 싶기는 하다.
어른을 위한 동화를 많이 쓴 (故) 정채봉 님의 ‘멀리 가는 향기’나 정호승 시인의 항아리’.
그리고 요즘 부쩍 많이 읽히는 황선미 작가의’마당을 나온 암탉’ 같은 동화를 읽으면
얼마나 삶이 더 아름다운지! 얼마나 더 마음이 애틋하고 따스해지는지!
생생하고 감동적인 동화를 빚어내는 이들에겐 늘 부러움을 느낀다.
그동안 나의 글들을 아끼고 사랑해 준 많은 독자에게 일일이 감사의 편지를 쓰진 못하더라도
두고두고 선물이 될 수 있는 한 편의 멋진 시를 쓸 수 있기를 기대해 볼까.
아니면 서툰 솜씨로나마 산과 바다와 흰 구름이 있는 한 폭의 수채화를 남겨 놓을까.
꼭 글이나 그림으로 작품을 남기진 못하더라도 나의 삶이 한 편의 시가 되고 그림이 될 수 있도록
순간순간 을 더 성실하고 겸손하게,더 단순하고 투명하게 내 남은 날들을 채우고 싶다.
근래에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한 말을 나는 늘 기억하고 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게 인생의 고비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라는 그 말을 곧 한가위를 앞두고 내일은 내 어머니 기일이기도 하여 형제들과 같이 산소에 가서
삶의 유한성을 좀 더 깊이 생각하고 오리라. 어느 날의 내 죽음도 미리 묵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편 노래를 부르리라 ‘천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나이다…
- 동아일보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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