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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한국의 비경 (창덕궁 후원)

by 밝은 미소 2018. 11. 28.

 

 

창덕궁은 궁궐의 면모도 훌륭하지만 특히 아름답고 넓은 후원 때문에

 왕들의 사랑을 받았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정원을 만들었는데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존덕지 같은 연못을 만들고

옥류천 주변에는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 등

아담한 규모의 정자들을 세워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하였다.

 

 

후원은 창덕궁 전체의60%를 차지할 정도로 넓고 가끔 호랑이나

표범같은 맹수가 나타나기도 했을 정도로 깊다.

게다가 절경들은 골찌기마다 숨어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으므로

 직접 걸어서 골짜기의 못과 정자들을

 찾아다녀야만 후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후원은 왕과 왕실 가족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공간이었지만 왕이

주관하는 여러 가지 야외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참석하는 군사 훈련이

자주 실시되었고 활쏘기 행사도 열렸으며 대비를 모시는 잔치나

종친 또는 신하를 위로하는 잔치도 배풀어졌고 성종 때에는 불꽃놀이도 했다고한다.

 

 

 

 

 

 

 

 

 

 

 

 

 

 

 

부용지옆에 어수문(魚水門)과 주합루(宙合樓)가 보인다.

 

 

                                                                                    주합루는 1776년(정조 즉위년)에 지은 2층 누각이다.

아래층은 왕립도서관인 규장각 서고이고

 위층은 열람실이다.
초기 왕실도서관으로 출발한 규장각은 점차 정책연구기관으로

기능하여 정조의 개혁 정치와

조선 중기 문예 부흥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 박제가, 유득공,이덕무 등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다양한 인재들이 여기서 활동하였다.

 

주합루라는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에는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 있다.

어수문은 임금이, 그옆의 작은 문으로는 신하들이 출입했다.

 

 

 

 

 

 

어수문(魚水門)

 

 어수문(魚水門)에는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 있다.

어수문은 임금이, 그옆의 작은 문으로는 신하들이 출입했다.

 

 

 

영화당(暎花堂)

 

영화당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현재 건물은

 숙종 18년(1692년)에 재건한 것이다.


왕족의 휴식공간이자 이 건물의 앞마당인 춘당대에서는

 친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하였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부용정(芙蓉亭)

 

부용정(1792년 건립)은 十자형을 기본으로 하되

남쪽으로 양쪽에 한 칸씩 보태

다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정자이다.

 

 1795년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다녀온 뒤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부용정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十자형 건물은 완주 송광사 종루와 부용정이 유일하다.

 

 

 

 

 

 

 

 

불로문(不老門)

 

불로문은 하나의 통돌을 깎아

 세운 문으로 임금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이 있다.

 

숙종18년(1692년)에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이다.

숙종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연경당(演慶堂)(보물:1770호)과 선향재(善香齋)

사대부 살림집을 본뜬 조선 후기 접견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순조 28)경에 창건했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는 연결되어있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 민가가 99칸으로 규모가 제한된 데 비해,

연경당은 120여 칸이어서 차이가 난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후원 높은 곳에 있는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안채 뒤편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반빗간이 있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연경당은 2012년 보물제 1770호로 지정되었다.

 

 

 

 

연경당은 안채와 사랑채를 따로 둔 사대부 집처럼 지었으며

궁궐의 전각이면서도 단청되지 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후원의 정취를 더 한다

 

 

 

 

 

 

 

 

 

 

 

 

 

 연경당 안쪽의 모습

 

 

 

 

 


 

 

 

 농수정(濃繡亭)

 

 

 농수정(濃繡亭) 연경당(演慶堂) 선향재 뒤쪽의 화계 깊숙히 들어앉은 후원 별정으로 정 측면 1칸에 익공계 사모지붕이다.

장대석 기단위에 사다리꼴 초석을 두고 그 위에 방주가 서 있다.

주간 4면에 벽이 없이 아(亞)자를 기본 삼아 완자무늬로 짠 사분합(四分閤)이 달렸는데

경우에 따라 문을 모두 열어 위로 매어달면 일시에 완전히 개방되도록 하였다.

 

천정은 소란반자이고 내부는 우물마루로 되어 있고 정자 기둥 밖으로도

쪽마루를 깔고 법수(法首)모양의 귀기둥이 있는 조그만 난간을 둘렸다.

전면과 일부 측면에 출입을 위하여 난간을 끊어 석계와 통하도록 하였다.

사각 기둥에는 각각 주련이 달렸고 지붕은 겹처마이고 정상에 절병통(節甁桶)을 놓았다.

농수정에서 내려 오면 예전에는 말을 타고 드나들던 제법 큰 일각문이 있다 이문을 나서면 승재정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농수정(濃繡亭)으로 올라가는 계단옆에는 서재로 쓰던 선향재(善香齋)가 있다

선향재(善香齋)

 

선향재는 서책을 보관하고 책을 읽으며 또 손님을 맞이하는 집이었다.

선향재 장서지처(善香齋藏書之處)라는 글이 궁궐지(宮闕誌)에

있는것으로 보아 연경당의 서재로 지어진 집임을 알 수 있다.

집의 구조는 정면7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큰 마루를 두고 좌우로 온돌방을 두었다.

이 집의 서쪽에는 차양을 달았는데 예로부터 사대부집에 만들어져

따가운 석양볕이나 비바람을 피하던 구조이다.

선향재의 동쪽 언덕에는 돌을 층층이 쌓아 화계를 만들어 꽃과 나무를 심어 놓고 보며 즐겼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놓인 사잇담

 

 

 

 

 

 

 

 

 

 

 

 

 

 

 

 

 

 

 

관람지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觀纜亭)

 

관람정은 우리나라 유일의 합죽선 모양의 정자이다

관람지는 원래 한반도 모형으로 생겨

반도지였었는데 고종 때 일제가 연못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고쳐서 관람지로 명칭이 바꾸었다고 한다

 

 

 

 

뒷쪽에 있는 건물이 존덕정(尊德亭) 육각정자의 지붕이

특이하게 겹지붕으로 되어있는데

인조22년(1644)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내부에는 '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正祖의 친필 현판이 걸려있다 

 

 

 

 

 

 

 

 

 폄우사 (貶愚謝

 愚謝란 어리석음을 경계하여

고쳐준다 라는 뜻인데

효명세자가 이곳에서 독서를 했다고한다

 

 

 

 

 

 

 

 

승재정(勝在亭)

 

반도지의 남쪽 언덕에 위치한 정자로 정면과 측면이 각 1칸씩인 익공계 사모지붕이다.

8각형 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고 사방에 사분합문을  단 것이 특징이다.

 또한 정자기둥 밖으로도 쪽마루를 깔고

아자교란(亞字交欄)을 달았으며 통로가 전후로 나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정상에는 절병통(節甁桶)이 있다.

 

                                                                                             승재정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없으나

동궐도에 초정(지금의 승재정 자리)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기에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경당에서 샛문을 통해 관람정으로 넘어가는 길이 너무 아름답다

 

 

 

 

 

 

 

 

 

 

 

 

 

 

관람정에서 옥류천으로 올라가는 길

 

 

 

 

 

 

 

 

 

최규정

최규정은 옥류천으로 출입하던 왕이 아랫쪽의 경치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고 책을 보던 곳이라고 한다

 

 

 

 

 

 

 

 

옥류천 가는길

 

 

 

 

취한정(翠寒亭)

 

창덕궁 후원의 취규정을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언덕을 내려가면 옥류천 계곡이 나오는데,

옥류천 계곡 입구에 자리잡은 정자가 바로 취한정이다.

 

취한정은 정면 3간, 측면 1간의 팔작 지붕 건물인데

정면 3칸의 간설이 구조가 특이하다.

중앙의 협간 넓이가 좌우의 협간 넓이의

2배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언덕 위의 취규정과 같은 구조이다.

 

 

 

 

 

 

 

 

 

 

농산정(籠山亭)

 

농산정은 옥류천 주변의 정자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구성도 특이하다.

평면도를 보면 방 2칸, 마루 2칸, 부엌 1칸의 5칸 건물로

행랑채와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다.

 

이는 왕이 신하들과 옥류천에 들러 주연을 베풀 때 다과와 음식 등을

 마련하던 용도로 쓰인 것이 아닌가 추정케 한다.

한편 <동궐도>에도 농산정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있는데

 농산정 입구에 꽃나무 가지 등으로 담장을 쌓은 취병을 두른 모습이 지금과 다르다.

 

 

 

 

소요정

 

  

소요정 옆으로는 옥류천에서 내린 물줄기가 흐른다. <궁궐지>에 의하면

 인조 14년(1636)에 건립하였으며,

처음에는 탄서정(歎逝亭)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보인다.

소요정은 창덕궁의 정자들 중에서 비교적 소박한 축에 속하지만

소요정 만큼 역대 국왕들이 가장 아끼며 즐겨 찾던 정자도 없었던 것 같다.

 

<궁궐지>에 따르면 소요정과 관련된 역대 왕들의 시가 전하는데

숙종, 정조, 순조 임금 등이 각각 시를 남겼다고 한다.
소요정에서는 왕이 신하들과 어울려 주연을 베풀어

 유상곡수를 즐기며  소요정의 정취를 극찬하기도 했다고 한다.

 

                                                                                             성종, 선조, 인조의 어필로 된 글귀 등을

이곳에 걸기도 했다고 한다.

 정면 1간,측면 1간의 사모정으로 익공양식이며 홑처마에 사모지붕이다.

 

 

 

 

 

 

 

 

태극정(太極亭)

옥류천 북쪽에 있는 정자로 조선 인조 14년(1636)에 소요정과 함께 세워졌으며

창건때 이름은 운영정(雲影亭)이라 하다가 개명하여 태극정이라 하였다.

정사적형 화강암 기단위에 다시 외벌대 첨계석을 둘렀다.

정 측면 1칸의 사모지붕으로 내부에 마루를 깔고  쪽마루를 달아 낮으막하게 난간을 둘렀다.

각 원주에는 주련을 달았고 현제 4면은 개방되어 있다.

천정은 우물천정에 처마는 겹처마이고 정상에 절병통(節甁桶)을 얹었고 각부재에는 단청을 하였다.

정조의 어제 '태극정 시(太極亭 詩)가 있고 숙종의 어제'상림삼정기(上林三亭記)등이 전한다.

 

 

 

소요암에는 인조의 玉流川이라는

어필 위에

숙종의 오언절구시가 새겨져 있다.

 

 

 

  숙종의 漢詩

 

    流三百尺(비류삼백척) : 폭포는 삼백척인데

    요락구천래(遙落九天來) : 멀리 구천에서 내리네

    看是白虹起(간시백홍기) :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고

    번성만학뢰(飜成萬壑雷) : 골짜기마다 우뢰소리 가득하네

 

 

 

이곳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자기 차례가 오면 술한잔에
詩 한수를 지어야 했다고 한다

또한 그 차례가 되어 詩 한수을 짓지 못하면 칙을 받았다

 

 

 

 

 

 

 

 

 청의정

 

정자아래 물이 있는곳에 벼를심어 수확하고 나서

 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얹었다고 한다

 

청의정은 바닥은 사각형이고 지붕은 둥글게 만든 창덕궁

내 유일한 초정(草亭)으로

 조선시대 청의정 주변 작은 논에 임금이

발을 벗고 모내기를 한 후 그해 농사의 풍흉을 가늠하는 곳이었다.

 

 

 

 

 

 

 

 

 

 

 

 

 

 

 

 

 

 

 

 

 

 

 

연경당 뒤쪽의 풍경들

 

 

 

 

 

 

 

 

 

 

 

 

 

 

 

 

 

 

 

 

 

 

 

 

 

 

 

 

 

 

 

 

 

 

 

 

 

 

 

 

 

 

 

 

연경당 옆길 계단을 올라 걸으면 창덕궁 정문으로

나가는 산책길이 나오는데

 너무 아름다운 길인데 단풍이 절정인 모습이 아니라서 아쉬웠다

 

 

 

 

 

 

 

 

 

 

 

 

 

 

 

 

 

 

 

 

 

 

 

 

 

 

 

 

 

 

 

 

 

 

 

 

 

 

 

 

 

 

 

 

 

 

 

 

 

 

 

 

 

 

 

 

 

 

 

 

 

 

 

미리 인터넷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창덕궁 후원 지난해 10 26일 갔을 땐

단풍이 들지 않아서 관리 하는 아저씨가 11월 중순경이 되어야 후원은

단풍이 절정이라 해서 지난 11 13일 후원을 찾았더니

 올해는 이미 단풍이 많이 떨어져 절정인 모습을 또 놓치고 말았다

올해도 또 시기를 놓쳐  단풍이 아름다운 절정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혼자서 여유롭게 돌아본 후원의 풍경들은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창덕궁 후원의 모든 자료는 문화재청에서 발췌)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