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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살찌우는 글들/믿음 의 글들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7일간의 신앙도전)

by 밝은 미소 2022. 4. 24.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7일간의 신앙도전)

7개의 주제를 통한 7일간의 신앙도전

 

2022년 4/15일(금)

5.선택/-최성은 담임목사-

눅22:47-62

우리가 삶을 살면서 한가지 기억해야 될것은 삶은 선택의 연속인데 모든 사람들은

죽은후에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히9:27 한번 죽는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들은 선택을 할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기준에 의해 선택을 하게된다.

그 가치기준 때문에 선택을 하게되고 선택은 거기에 대한 결과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인간은 죄성이 있기 때문에 무엇을 선택을 할때 기본적으로

(육신적인 생각이 다 우리 마음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요한1서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것이 육신의 정욕과 인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 온것이 아니요 세상을부터 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런것이 우리 육신적인 가치관속에 
쫙~ 깔려져 있다.

오늘 본문에는 대조적인 인물 두사람이 등장을 한다.

두사람 비슷한 선택을 한것처럼 그렇게 보인다.그러나 마지막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왜 그런지 우리가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한사람은 예수님을 팔아 넘겼고 한사람은 예수님을 부인했다.

어떤 선택이 비슷한 선택이었던거 같은데 그 결과를 만들었는가?'

 

첫째.가룟유다는 어떤 기준을 갖고 예수님을 선택을 하였는가?

가룟유다는 자신의 욕심과 탐욕을 위해 예수님을 선택하였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이 자신이 정한 선택의 기준에서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얼마던지 그의 주인을 바꿀 수 있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선택을 하였다.

실은 그가 인생의 주인이었다.

예수님을 선택한것은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마지막 최후의 선택은 최악이었다.

인간은 죄를 지을 때 양심에 찔끔한다. 그렇다고 내가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이거나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은 안된다.

우리도 때로는 가룟유다같은 선택을 한다. 옛사람의 모습으로 행동을 할때가 있다.

우리 모습속에도 가룟유다의 모습이 때로 나타날때가 있다.

양심과 신앙을 잠시 내려놓고...

가룟유다는 3년동안 회개할 기회가 있었지만 자신의 본능대로 생각대로 가치관

대로 움직엿다. 자신의 선택의 기준이 자신의 탐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가룟유다를 다 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존재를 다 아신다

그 죄인임을 다 아심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때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예수님이 그를 사랑하였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롯유다는 자신의 탐욕대로 인생을 선택하며

살았고 그 기회는 사망이었고 다시 부활할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렸다.

 

둘째 베드로의 선택기준은 무엇이었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때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떠나 달라고 주님앞에 무릎을 꿇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순종하며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며 하나님이 보내주신 분이라는것을 즉각적으로 깨달았다.

베드로는 밤새 예수님과 함께 했다.

그가 두려움에 예수님을 부인하였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찾아가신것은 두사람의 사랑 때문이었다.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사랑했다.예수님과 동행하면서 베드로가 하던 말을

생각해보면 그를 알 수 있는데 베드로의 선택은 사랑이었다.

가룟유다와 베드로의 선택을 보면서 우리도 삶속에서 수많은 선택을 할때 배울 수

있는 4가지가 있다.

 

1.선택의 기준을 사랑으로 정하라.

나의 삶의 기준을 사랑으로 정하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였다.

현실이고 역사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기전 한 행동을

묵상해 보면 그는 예수님을 사랑했다.

베드로는 밤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함께 하였다.

사랑하는데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자신의 이익이 어떻게 될까봐 그는

예수님을 한번도 떠난적이 없었다 죽음의 공포앞에 실수를 한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나는 이제 물고기 잡으로 간다고 말하였다.

베드로가 다시 주님께 돌아올 수 있었던것은 그가 두려움에 예수님을 부인하였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찾아가신것은 두사람의 사랑때문이었다.

베드로의 의가 아닌 그가 다른제자들보다 잘난것도 아닌 바로 예수님 사랑때문이다.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없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사랑했다. 탕자는 자신의 죄를 깨달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깨달았고 베드로는 자신을 불러주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선택을 할때 사랑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면 실했을때 다시 돌아올 수 있다.

 

2.선택은 그에 따른 결과를 가져오며, 선택은 테스트를 받는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존중하고 사랑으로 선택하여 주님을 따른것은 맞다.

그러나 베드로의 선택은 진정한 사랑과 자신의 야망이 같이 섞여 있었다.

이러한 우리 불순물이 섞인 불순물이 시험을 받을때가 신앙인에게는 온다.

기억하라 우리의 사랑은 테스트받는다. 사랑은 테스트 받아야 맞다

불같은 우리의 사랑을 테스트받는다.그래서 불순물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영적으로 구원받은 교회의 공동체 사랑은 어떠해야 하는가?

나와 주님과의 사랑은 육신처럼 사람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그 사랑을 무엇으로

테스트 받겠는가?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 사람들을 사랑한다 는 불같이 타 없어질때 그 남은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결과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였다.

3번을 예수님을 부인하였던 베드로가 고백하는 주옥같은 말씀이다.

벧전4:13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된다.)

 

3).선택의 순간에도 실패의 순간에도 주님을 다시 바라봐야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나서 주님과 눈을 마추친다.

우리가 사랑으로 신앙을 시작하였다면 실패할때 주님이 우리와 눈 마주침을 해주실것이다.

우리를 쳐다봐주실것이다 그때가 중요한것이다. 바로 그때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을 회복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모든사람은 두번째 기회를 얻을 자격이 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시는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시는가 사랑을 선택한 사람을 기회가 온다. (사랑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선택의 순간에도 실패의 순간에도 주님을 다시 바라보는것이 중요하다.)

 

4).선택이 실패 했을 때 갈보리산에서 회개하라.

나의 삶의 선택이 실패했을때 절망가운데 있을때 갈보리 산으로 다시 가서 회개하라.

눅22: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주님과 눈이 마주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히 통곡한다.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하시듯이 통곡을 한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예수님님의 고통이 느껴지고 자신의 그 사랑이 얼마나 보잘것이 없는지를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며 깨닫는다.

그가 가진 사랑의 불순물들이 타 없어지는 회개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도 생각났을 것이다.

눅22:31시몬아,시몬아,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너는 돌이킨 후에 회개한 후에 깨달은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사명까지 이야기 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실패 회개까지도 예언해주셨고 사명 감당까지도 다 이야기 해주셨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을때 다 이야기 하셨다.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신것 처럼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계획을 사명까지 말씀을 해주셨다.

우리 삶가운데 두려움과 의심은 모든것을 기억속에서 다 잃어버리게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을 제거해준다.

사랑하기 때문에 회개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다시 주님을 찾을 수 있는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하며 갈보리 언덕에 가서 깨닫는 깊은 충격이 있는데 바로 

주님이 나보다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우린 착각을 한다. 내 사랑이 헌신이 주님의 사랑보다 더 크다고. 그때 바로 실족을 한다.

주님께서 나를 몰라주신다고 그리고는 뭔가 조금 깨닫고 갈보리 언덕으로 갔을때 이미 

주님께서 거기에서 나를 위해 먼저 희생하신것을 사랑하신것을 먼저 피흘리시고

죽으셨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죽음으로 실패한듯 보이지만 모든 악한 권세를 물리치시고 승리하셨다는

것도 발견한다.(나를 위한 십자가의 승리가 거기 있다라는 것도 발견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도전합니다.베드로를 공포에 떨게했던 3번의 주님의 질문

그것은 거기 너 있었는가 였습니다.

베드로를 두렵게 한 3번의 말씀 너 예수님을 정말 사랑했는가 물으시는 것이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이 말에 대한 대답이 yes일 경우 그렇습니다.

그물음이 사탄에게나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나 주님에게가 그 대답이 yes일

경우에 핍박과 죽음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되면 크리스찬이 되면 거기 너 있었는가? 이 질문하나를 통해서 있었다.라고

선택을 하면 바로 죽음이 엄습할 수 있는 그런 상황에 놓여져 있는 사람들도 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1절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2절.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나무 위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3절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해가 그 밝은 빛을 잃을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4절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무덤 속에 뉘일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5절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무덤에서 나올 때

오 때로  그 일로

주께 영광 영광 영광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2022년4/16 (토)

십자가/-최성은목사-

요19:14-22

어제 우리는 성금요일 주의 만찬을 하고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시간을

다시 한번 갖는다. 우리는 실제로 십자가를 진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만약 역사속에서 십자가를 졌다고 한다면 자기 죄의 형벌 때문에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졌던 십자가 혹은 신앙을 포기 하지 않는것들 때문에 졌던 십자가.

그런데 어느누구도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경우는 없다.

우리는 주님이 지고 가신 그 십자가의 자리가 궁금하다.

그리스도인으로 늘~ 그십자가를 묵상해도 그 깊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는것

지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 넓이와 깊이가 과연 어떤것인지를 인간은 알 수 가

없는것이 십자가의 무게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의 죄가 거기에 담겨 있기때문이다.

 

십자가는 어떤 자리일까 본문을 통해서 몇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십자가는 고난의 자리이다(15-16절)

없애 버리라고 말함 사람들이 악에 바침 모욕과 치욕 예수님과 함께했던 사람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 말씀을 가지고 예수를 찌름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 말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찌른 말이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분이심

이말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찌른것이 있을까? 끝까지 사람들은 기적을 현상을 보기 원한다.

사랑을 보기 원하지 않음.

십자가의 형벌은 가장 잔인하고 공포심을 주고 십자가는 탈진과 고통을 줌 수치심을 주고

보는이에게도 환멸을느끼게 하고 (십자가는 비난과 조롱의 자리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부활로 넘어가기 전 영광으로 가기전에 십자가는 분명한 비난과 조롱의 자리

고통의 자리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영적 정신적 육신적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고난의 자리 대체 불가능한 자리이다.

내가 진 십자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수 있다.우리의 삶에는 자발적인 고난도 있고

찾아오는 고난도 있다. 예수님의 고난은 자발적인 고난이다.

성도들의 삶에도 많은 고난이 있다.

때로는 이 고난이 왜 시작되었는지 욥처럼 모를 수 도 있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주는 의미는 엄청난 격려이다. 내가 힘들고 누구도 상황과 형편을

이해할 수 없을때 위로할 수 없을때 내가 바라볼 수 있는 단 한가지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도 나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다는거 죄가 없으시면서도 고난을

당하셨다는거 십자가가 고난의 자리이지만 우리가 바라보고 격려를 받을 수 있는 자리라는것

이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특권이 되는것이다.

 

2.십자가는 영광스러운 사명의 자리이다.(17절)

십자가가 아무리 힘든 자리일지라도 십자가는 사명의 자리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평상시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자기 십자가를 취하시고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셨음. 아무리 어렵고 피하고 싶어도 십가가는 사명의 자리이고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영광스런 자리이다.

사명을 감당할때는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는 것을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내가 무엇을 잘해서 사명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능력이 있어서 업적이 있어서

나에게 사명을 맞겨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은 사명을 주실때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는것을 깨닫는것은 중요함.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영광도

하나님이 주신 동시에 십자가를 지는 능력도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하는것이 중요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자리이다.

 

3.십자가는 순종의 자리이다.(18절)

사명에는 순종하는 것이 절대적이고 사명은 피할 수 있는것이 아니다. 사명을 가장 잘

감당할 수 있는것은 주님이 주신 사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자리는 죄인이 아닌 예수님께서 죄인인 두 강도의 가운데에서 매달려야 하는

순종의 자리이다. 우리가 고난의 자리를 걸어갈때 같이 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힘을 받기 위해서 사실 일이 힘든게 아니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분위기 때문에 힘들때가 있다.

고난의 자리에 같이 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 보기만 해도 혈압이 오르고 내 고난이 가중되고

예수님이 서 있는 그 극악무도한 강도가 양쪽에 있는 가운데 그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림이다.

(순종의 자리는 그런것이다 내가 가고 싶지 않은 자리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는 마지막까지

수치스런 자리였음 그 그림을 보여주는 자리이다.)

너희들의 죄 한복판에 내가 매달렸다는 것을 마지막 이 세사람의 십자가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모든것을 순종하심

십가가의 자리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순종의 자리임. 할 수 만 있다면 쓴잔도 마셔야 하는자리

부름받은 자들 사명자들은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누구도 내 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내가 잘나서 하나님께서 여기 부르신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뜻이 있어서 여기 부르신 것이니 라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분 앞에 순종하는것.

하나님은 그 순종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심.

나의 능력과 업적이 아니라 순종의 작은 겨자씨의 믿음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더욱 크게

역사하시기 시작하신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주님을 바라볼때 하나님

말씀에 대한 대한 순종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그러한 순종 십자가를지는 종의 자세이다.

 

4.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자리이다(19-21절)

유대인의 왕 너의 왕이란 말이 4번이나 반복된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유대인의 왕이라

조롱을 받음 예수님은 실제로 그들이 말한것처럼 유대인의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고

사명자는 때로 이렇게 주변사람들 때문에 낙담한다.사명을 잃어버릴것 같은 일도 있다.

악이 득세하는듯 하여 그렇다. 아무리 내가 발버둥 처도 승리가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때가 그랬다.하나님은 그들의 악함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셨다.

나사렛예수 유대인의 왕이란 말은 히브리어,아람어,일반대중들의 언어 라틴어.헬라어 이모든 말이

모든 사람이 알아볼 수 있도록 진리의 말로 번역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졌다.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을 쓰려뜨렸다고 생각했을것이고 승리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못박히심은 우리들을 위한 엄청난 구원의

성취를 가져오는 사건이었음.

하나님은 어떤것을 통해서도 당신의 분명한 뜻을 이루어 가심

우리는 십자가를 볼때 무서워 하고 피하고 싶어 한다. 십자가가 고난의 자리 고통의 자리인것은

분명하지만 십자가는 영광스러운 사명의 자리이고 이세상의 어떤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사명의 자리 하나님이 나하나 믿고 나에가 주신 영광스러운 사명의 자리 그것을

순종했을때 모든것이 협력하여서 선을 이루시는 이처럼 십자가 상에서 모든것이 실패한것 같고

끝난거 같고 악이 득세하는 것같은 이자리에서도 모든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셔서

영광을 들어내시는 그 영광의 자리 이 십자가의 자리를 안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줄로 믿습니다.

결국 주님은 모든 사망과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에서

승리하셨다. 우리는 이 모든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임. 그러면 우리는 실패와 절망의 자리에서

의심이 들때마다 십자가를 보면서 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 다시 한번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궁극적으로 가져다 주신 것이 무엇인지 그 부활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한다.

십자가가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강조해야 한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십자가와

그리스도께서 못박히신 그 사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를 작정하였노라.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것은 주님은 십자가에서

부활하셨다. 늘 삶에서 십자가에서 울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의 그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는것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씻어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고 십자가는 우리의 고난의 자리를 동참해 주시기 위해

오신것이고 십자가는 우리를 울게하고 격려하는 의미가 있는것임.

 

그러나 십자가는 부활로 가기위한 과정이다. 마지막 승리를 이미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쟁취 하시고

놀라운 영광의 부활을 선포하셨다는것을 그리스도인의 가슴속에서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의 순교의 순간에도 수많은 이땅의 지구상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순교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십자가 뒤에 숨어있는 부활의 놀라운 영광의 역사를  알고있기 때문이다.

유월절의 놀라운 그 영광의 잔치가 그들 눈앞에 있는것을 그들이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현재

그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이다.

십자가는 영광의 놀라운 자리로 이어진다는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십자가를 묵상할때 마다 우리는 놀라운 통찰력을 얻게 되는것이다.

희미해졌던 우리의 영안이 뜨이게 되는것이고 역설적으로 십자가는 산소망을 주기 때문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큰 소망을 줄것이다.

삶이 괜찮을 때는 이런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피부로 느껴지지 않고 귀에 들어오지 않는데

고난가운에 있을때 아무도 나를 대신해줄 수 없다는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비로서 그때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왜 주님께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셨는지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것이 무엇인지 고난과 고통의 십자가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놀라운 부활사건을 맞이 했다면 십자가는 더 이상 실패의 자리가

고통의 자리가 아닌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영광의 자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