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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창덕궁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by 밝은 미소 2018. 2. 11.

 

돈화문(敦化門 보물383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으며,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덕궁 회화나무 / 천연기념물 제472호​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있다.

돈화문 안마당 좌우에 자라는 8그루의 회화나무 모두 천연기념물이다.

나무는 높이 15~16m,높이 줄기둘레 2~3m,

나이는 약 300~400년에 이른다.

이곳의 회화나무는 1830년 무렵의 창덕궁 그림인 동궐도에도 나타난다.

 

 

 

 

 

 

 

 

 

 

 

 

 

 

 

금천교(錦川橋 보물 제1762호)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되어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하여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1411)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규모는 의장(儀杖)을 갖춘 국왕의 행차 때 노부(鹵簿)의 폭에 맞도록 설정되었으며,

상면은 길이12.9m, 너비 12.5m로 정사각형에 가까울 정도로 폭이 넓다.

구조는 하천 바닥의 중앙과 물가에 놓인 기반석을 토대로 홍예를 2개 튼

형식으로 물가의 축대는 부벽(扶壁)구실을 하고 있으며,

홍예 위에는 장대석 모양의 멍에돌을 얹었다.

다리의 상면은 불룩하게 곡면으로 만들고 바닥을 3칸으로 구분하여 칸마다

장대석을 고르게 깔았으며, 다리 가장자리에는 그 위에 동물상을 조각한 이주석이 세워져 있다.

 

난간은 머리 부분을 연화보주형(蓮花寶珠形)으로 장식한 법수와

그 사이에 세운 판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판석은 하엽동자기둥(荷葉童子柱)모양의

 부조를 중심으로 2칸으로 분절되었고 칸마다 안상을 투각하여 놓았다.

법수 밑에는 멍엣돌 위치에서 돌출된 석재에 짐승머리모양을 환조(丸彫)로 조각하였다.

 다리 측면의 홍예 사이 벽에는 귀면형(鬼面形)이 부조되어 있고, 그 아래쪽의

 홍예 기반석 위에는 남쪽에 해태상, 북쪽에 거북이상 등 환조로 만든

 동물상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금천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며, 궁궐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각상과 아름다운 문양,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 등이 돋보이는 이중 홍예교로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

 

 

 

 

 

 

 

 

 

 

금천교 다리를 건너면 진선문(進善門)이 있다.

진선문은 정면 3간, 단층이며 문 좌우로는 행각이 이어져 있다.

진선문으로 들어가면 좌측(북쪽)에 인정문이 있고

인정문(仁政門)으로 들어가면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이 있다.

 

 

 

 

 

 

 

 

 

 진선문(進善門)옆 행각에서는 왕후

입궐하는걸 재현하고 있어서

가마는 탈 수 가 없었지만

왕비처럼 우아하게 오고 가고 걸어보았다

 

 

 

 


 인정문(仁政門: 보물813호)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인정전 (仁政殿 국보225호)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궁궐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문 밖 외행각(外行閣)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을 두었다.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 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외행각 일원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다. 인정전은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정전의 내부


인정전 안에는 정면에 임금님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다.

병풍에는 음양을 뜻하는 해와 달이 있으며 이는 다시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그 아래 다섯 개의 산봉우리는
우리나라의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산을 가리키며 이는 국토를 의미한다.
이것은 임금이 중앙에서 사방을 다스리고, 음양의 이치에 따라 정치를 펼친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유리창을 비롯하여 전구나 커튼 등

서양 장신구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 온 것이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인정전의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참고로 5대궁 중에서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온 곳은 1887년 경복궁이다.

 

 

 

 

 

 

 

 

 

 

 

 

 

 

 

 

 

 

 

 

 

 

 

 

 

 

                                                                                                                   선정문 (宣政殿 보물 제814호)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곳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魂殿,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현재 보물 제 8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담

 

 

 

 

 

 

 

 

 

 

                                                                                                                  희정당(熙政堂 보물 제 815호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궁궐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4년(연산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동궐도>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이 모습과 완전히 다르고,원래의 강녕전과도 다르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보물 제 8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정각과 관물헌은 세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일반 사대부 가옥처럼 지어진 건물이다

솟을 대문과 행각으로 이루어진 성정각 출입문인 영현문

국왕이 머물던 희정당(熙政堂) 동쪽편 후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세자가 머물던 동궁인 성정각 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였다고 한다

성정각 오른편에는 2층 누마루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일반 사대부 저택의 누마루와 마찬가지로 넓은 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름동안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경연이 열리거나 손님을 맞는 장소이다.

앞면1칸 옆면3칸 2층 누마루에는 남쪽에는 보춘정(報春亭)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 라는 현판을 달아놓았다

남쪽에 있는 보춘정(報春亭) 현판 

 

 

 

동쪽에는 희우루(喜雨樓) 라는 현판을 달아놓았다

 

 

 

 

창경궁과 후원으로 나갈 수 있는 작은문이 있다

 

 

 

 

중희당(重熙堂)터 (칠분서,삼와와, 승화루)

 

 

현재 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변해버린 곳이 바로 동궁의 중심 건물이었던 중희당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그 터와 부속 건물들만 현존한다. 최근에는 그 터를 화강석으로 표시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여 관람객들로 하여금 이해를 돕고있다.

 

<동궐도>에서도 제법 크게 그려져 있는 중희당은 1782년(정조6)에 정조가 문효세자를 위해 지었다

편액도 정조가 직접 쓰는 등 애착을 가지고 있던 전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문효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세자가 직접 지내지는 못하였다 (편액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정조 자신이 이곳을 편전으로 이용해 자주 정사를 보았으며,이후 효명세자(문조)가

대리청정을 했을때, 이곳에 거처하여 본래의 기능을 살린바 있다.

효명세자 역시 요절하였으나, 이후에도  중희당은 중요 정치공간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신정왕후 조씨(문조의 비)가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삼겠다고 선포했던 곳이 바로 여기이며 명성왕후를 왕비로 맞이햇던 곳도 바로 중희당이었다.

 

 

 

 

 

 

 

 

 

 

 

 

 

 

 

 

 

 

 

 

 

 

 

 

 

 

 

 

 

 

 

 

 

 

 

 

 

 

 

 

 

 

 

 

 

 

 

 

 

 

산국

 

 

 

 

 

 

 

 

 

산국

 

 

 

 

 

 

 

 

 

산국

 

 

 

 

 

 

 

 

 

 

대조전(大造殿 보물816호)

 비극적 역사가 담겨 있는 침전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寢殿)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이건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보물 제816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조전의 특징은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규eowhws모는 36칸으로 앞면 9칸·옆면 대조저4칸이며, 지

대조전의 특징은 지붕에 용마루가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

대조전의 특징은

 

람들의

 

선평문 (宣平門)

대조전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희정당(熙政堂)과 통한다.

높은 계단 위에 있는데 이는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을 함부로 볼 수 없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낙선재(樂善齋)보물 제1764호)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1966년까지

기거하였고,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낙선재는 2012년 보물 제 1764호로 지정되었다.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1405년(태종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고 광해군 때에

다시 짓는 과정에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창덕궁의 모든 자료는 문화재청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