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내 통명전(通明殿) 뒤에서 바라본 모습
통명전(通明殿) 뒤에서 바라본 모습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 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비(추존왕)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세종 즉위년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지난 11월 13일 좀 늦은 감은 있지만 그래도 서울한복판의 창덕궁 후원은 단풍이 남아있길
고대하면서 찾았던 창덕궁과 비원 그리고 바로 옆에 붙어있는 창경궁을 돌아보았다.
몇 번씩 찾았던 고궁이라서 눈에 익는 풍경이었지만
조선의 아픈 사연이 많이 숨어 있어 임진왜란 때
전소된 적이 있고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에도 화를 입었으며
숙종 때의 인현왕후와 장희빈, 영조 때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이야기들이 창경궁 뜰에 묻혀 있지만
晩秋의 아름다움에 가려져 있어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가을하늘 그리고 금방이라도
붉은물감 노란물감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晩秋의 창경궁 뜰을 거닐면서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 시간들이었다.
춘당지(春塘池)
이 연못은 춘당지라 부르는 연못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렇지만 이 두 연못이 전부 춘당지는 아니었다.
아래쪽의 큰 연못은 원래 내농포로
국왕이 궁궐 안에서 직접 농사짓는 의식을 행했던 곳이었다.
1909년에 일본인들이 이곳에 연못을 만들었고, 1986년에
우리 전통양식에 가깝게 재조성한 것이다.
위쪽의 작은 연못이 원래의 춘당지로, 백련지/백련담 등으로 부른 기록도 있다.
홍화문(弘化門) (보물 제 384호)
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弘化)는‘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 8)에 재건된 건물이다.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에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고,
<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 라는 기록화에 그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명정문(明政門) 및 행각(行閣) (보물 제 385호)
명정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행각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中庭)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인데,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열의 주열(柱列)에는
각 칸마다 2매씩의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다.
이 건물은 포작(包作)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명정전(明政殿) (국보 제 226호)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正殿)으로,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이다.
인종이 1544년(중종 39)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1759년(영조 35) 6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또는 가례(嘉禮))가 치러지기도 했다.
1484년(성종 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니,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이는 애초에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은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이다.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朝廷)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정전 마당 양옆에 늘어선 돌들은 품계석이라 하는데, 행사 때
문무백관들이 품계석에 새겨진 각자의 품계에 맞춰 국왕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무신, 좌측에는 문신이 선다. 또한 삼도 가운데 중앙에 있는 어도는 국왕이 이동하는 길이었다.
명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 있는 경사진 돌을 답도라 하는데 그 위로 국왕이 탄 가마가 지나갔다.
명정전 건물 내부에는 국왕이 앉았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병’이라는 병풍이 있다.
해와 달은 국왕과 왕비 또는 양과 음을 상징하고,
다섯 봉우리의 산은 전국의 오악 또는
오행을 상징하여, 국왕과 왕비가 전국토를 잘 다스림을 뜻한다고 한다.
명정전 앞 양 옆에는 ‘드므’라 불리는 큰 청동그릇이 있다.
드므에는 물을 가득 담아두어 화재예방의
의미가 있지만, 화마가 불을 지르러 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낙선재 담장너머 곱게 익은 감
통명전(通明殿) (보물 제 818호)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통명전은 보물 제8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았다.
이곳에서는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다.
1694년 (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다.
희빈 장씨는 이로 인하여 사약을 받게 되고, 희빈 장씨의 시신은
정문인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을 통해 나가게 된다.
통명전 뒤뜰에는 샘이 있는데, 1757년(영조 33)에
‘샘물이 맵도록 차다’고 하여 열천(冽泉)이라 하였다.
통명전 서쪽의 연지는 샘이 마당으로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1485년(성종 16)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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