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시리즈-(60) 두려움을 평화로 바꾼 사람들
2022/02.27/주일예배.
누가복음:24:36-49/지구촌교회/이동원 원로목사
말씀본문 (누가복음 24:36-49)
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 되었으니
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기독교 실존주의 철학자 가운데 덴마케 키에르케고르가 쓴 공포와 전율.이라는 책이 있는데
본래 이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제목은 빌립보서 2장에서 나온 말입니다.
너희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라는 말씀에서 인용된 것입니다.
이 책에서 킬겟가르는 구약의 성경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갈등이 있었겠죠. 그 갈등은 부모로서 아비로서 자식을 죽여야 한다는
윤리적 갈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앞에 그 자식을 바쳐야 한다는
신앙적인 갈등속에서 아브라함에게는 두렵고 떨림이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소위 킬겟가르의 편음이면 윤리적 실존 내가 내아들을 죽이는 것이 가한일인가
이 윤리적 실존과 그러나 하나님앞에 믿음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종교적 실존 사이에서
갈등하며 아브라함은 도적적 당위를 넘어서서 신 앞에 홀로 서는 개별자 아니면 단독자
로서 고독한 결단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때때로 신을 믿는 자들은 신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불안을 안고 양심의 소리와 모순되는
결단을 해야 하는 자리에 설 수 도 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버지로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음같은 절망을 경험하며 하지만
절대자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 절대 고독의 자리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그의 편을 빌면
믿음의 도약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킬겟가르가 자주 사용하는 믿음의 도약(Leap of Faith)
믿음으로 도약하는 고독한 딜레마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킬겟가르가 철학자인데 동시대 영향을 끼치는 유명한 대표적인 철학자들 헤겔,칸트.
이런 사람들은 도덕이나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죠. 그러나 도적적 이상에 근거해서 보편적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결단을 이해할 수 가 없을 것입니다.
킬켓가르는 오직 이성을 초월할 수 있는 믿음으로 해야만 했었던 결단 그래서 킬겟가르는
믿음이란 때로 믿지 못할것을 믿어야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수용해야 역설적 절대고독의
결단 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윤리적 도적적 신존의 차원에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 차원을
넘어서는 종교적 실존 하나님 앞에 홀로서는 존재이어야 한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2000년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또한 그런 자리에 서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갑자기 그들 앞에 등장하셨어요.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있는 예수님을 살아있는 예수님의 실체로 볼 수 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불안을 이길 수 있는가? 당연히 그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36-37절을 보겠습니다.
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생각한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유령으로 생각한것이 아닐까 그리고 갑자기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당혹함을 아시고 38절에서 예수님은
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이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마침내 두려움과 떨림을 넘어서서 평화를
경험하고 그 평화에 복음을 증거하는 담대한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의 제자들은 어떻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 두려움 그 두려움을
넘어서서 마침내 평화의 자리에 도달할 수 가 있었을까요?
오늘을 살아가는 예수의 제자들인 여러분과 저도 오늘 설명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두려움과
직면하고 있는데 우리 국가가 어떻게 될것인가 국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코로나와 그밖에 일련의 국제적인 상태에서 앞으로 우리의 경제는 어떻게 될것인가
경제적인 두려움 또 코로나가 보편화 되고 많은 사람들을 덮치고 있는 상황속에서 우리는
건강에 대한 두려움도 갖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런 두려움 마음에 두려움을 껴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존적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이 두려움을 평화로 바꾸는것이 가능할 수 가 있을까요?
그러면 그때 2000년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것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
Q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1.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확인한 까닭입니다.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먼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는데 그런데도 제자들은 아직도 믿지
못했다고 말함으로 부활하신 예수께서 친히 구운 생선 한토막을 잡수시므로 그분이 실제적으로
살아계신 분임을 증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참으로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하고 믿음만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예수 사건에 대한 불신앙 그것은 부활을 믿지 못한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만약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확인하고 믿을 수 만 있다면 모든 불안 모든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다면 새로운 삶이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우리가 경험해야 합니다.
미국 예일대학 법과대학 출신으로서 시카고 트리분이라는 신문사의 기자가 된 명 저널리스트
리 스트로벨 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사람은 철저한 무실론자 였고 종교적 회의주의자 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자기의 아내와 자기의 딸인 엘리슨이라는 딸을 데리고 식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식당에서 어린딸이 사탕을 먹다가 잘못하여 기도가 막히는 사고가 발생하고 그때 마침
그 옆자리에 한 흑인여성이 있었는데 간호사였고 그가 뛰어와 응급처치를 해서 어려운 순간을
모면할 수 가 있었는데 이 간호사가 말하기를 저는 실은 다른 식당에 가려고 했는데 우연히
발걸음을 바꿔 이 식당에 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틀림없는 주님의 인도고 주님의 뜻임에
틀림없다고 말을 하는데 이 말을 듣고 리 스트로벨은 아무 감동이 없었다. 그는 본래 신앙이
없었던 사람이니까 그냥 우연한 일이었겠지 하고 그런데 그 아내는 깊은 감동을 받고 그 여인과
친해지고 그 여인이 출석하는 교회를 함께 출석을 하게 됩니다.
딸이 살아난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스트로벨은 자기 아내가 혹시 예수에 미치고 교회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여 이 리스트로벨은 기자의 근성으로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그 예수는 허구적 존재라고 예수의 실체조차 믿지 못했던 그는 예수의 허구성을 파헤쳐
아내가 교회에 빠지는 것을 막기위해 예수 연구속에 몰입하고 2년동안 적당히가 아닌 철저하게
연구하고 모든 고대문서를 뒤지고 모든 성서학의 권위자 미국에 있었던 최고의 권위자,
고고학의 권위자,심리학의 권위자, 이런 권위자들을 만나 그가 인터뷰를 하면서 좌담을 하고
그러다가 그가 마침내 그가 불신하던 예수가 역사적으로 실존하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그가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확신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마침내 그는 무릎을 꿇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의로 영접하고 믿음이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가 써내려간 책이 예수는 역사다라. 라는 책입니다 이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어 천만부 이상이 팔리고 2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고 영화로도 만들어 져서 그 영화가
우리나라에도 잠깐 다녀간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목사가 되고 신학교 교수가 되어 택사스 휴스턴에 침례교대학에서 교수가
되어 변증학을 가르치는 우리시대 하나님이 쓰시는 강력한 예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왜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고 부활하신 예수의 실체를 경험한 때문입니다.
1세기의 제자들처럼 그래서 나는 여러분과 저도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그리고 우리
마음에 모든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이런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넘어서서 처음 제자들이 경험한 평화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던 비밀
두번째는
2.성경의 진리를 마음으로 경험한 까닭입니다.
처음 제자들이 성경의 진리를 마음으로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또하나 예수의 제자들이
마음에서 두려움을 내어 쫒고 평화를 경험하게 한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체험할 수
있기 때문.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설교를 접하지만
설교를 접한다는 것이 반드시 말씀을 경험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이라는것은 여전히 죽어 있는 글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글자들의 집합의 책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닙니다.
조금 그냥 좋은 소리가 많이 기록된 책 이것이 성경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이겠지요.
바울사도는 고린도후서 3:6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3:6 율법의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성경에 기록된 율법의 문자 그자체는 죽어있는 것이고 우리를 죽일 수 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영이 살리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죽어있는 글자에 성령께서 임하시면 이 죽어 있는 문자가 갑자기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활자 글씨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올 수 있는것이다.
본문 44절에는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성경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요 살아있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다가오는 순간 성경을 통해서 살아있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수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믿을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나고 말씀이 증언한 그리스도가 살아서 우리에게 다가올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는 그 순간 우리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나온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아직 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경험하지
못한 분들이 계십니까? 성경을 그냥 읽으시면 안됩니다.
기도하면서 읽으셔야 합니다 성경에서 성경에 대한 가장 예찬을 기록하고 있는
시편 119편을 읽어보셨습니까? 성경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성경에서 가장 긴장 말씀에 대한 예찬입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아직 살아있는 말씀으로 경험하지 못한분들은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으라.
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119:34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시119: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성경을 읽을때 이 말씀들을 붙들고 기도해 보신적 있으신가요? 이 말씀을 열어 주님의 놀라운
것을 보게 해달라고 이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그래서 이 말씀을 붙들고 지키며 살게 해달라고
갑자기 어둠에 빛이 비추듯 환하게 말씀이 깨달아 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적 있으십니까?
이런것을가르쳐 신학에서는 성령의 조명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조명하심(IIIumination Holy Spirit) 성령님의 조명하심 비추심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비춰지는 그 순간 우리는 이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감하고 경험하게 됩니다.
히4: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말씀이 그렇게 다가올 수 가 있다는 거죠. 그리고 이런 살아있는 말씀을 경험한 사람들은
마치 지나간 날 종교 개혁자 마틴루터가 고백한것을 함께 고백하게 됩니다. 그가 파면의
위협을 받으며 목숨의 위협을 경험하면서 네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것을 포기하라고 종용
받았을때 그가 했던 유명한 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달리 어쩔 수 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Here l stand, l can do no other, So Helf me O God).
그 순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의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자기 인생을 의탁하는
순간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그는 개혁자의 길을 담대하게 걷게 됩니다.
오직 말씀의 영이 그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유명한 표어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이 그 영에 역사함 이었던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런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가요? 모든 두려움을 넘어선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사로잡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말씀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그들이 두려움울 극복할 수 있었던 3번째 비밀은 그들이 순종한 때문입니다.
3.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을 체험한 까닭입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을 체험한 까닭입니다. 더 나가 예수의 두려움을 떨치고 담대한 예수님의
증인으로 나갈 수 있었던것은 본문 48,49절 말씀의 그들이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말씀을 받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락방에 머물러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오순절을 맞이하고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담대한 예수의 증인이 된것입니다.
사도행전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에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오늘은 3.1절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저는 3.1절 만세 사건에서 그당시 그리스도인의 참여가
예수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었지만 놀라운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독특한 빛을 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들의 애국심만이 아니고 애국심을 넘어선 민족을 위한 국가를 위한
중보기도자들 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1919년 3월1일 한양 서울에서 만세사건이 일어나고 한달이 지나 3월 31일 충청남도 병천면
지금의 천안 매봉산 꼭대기에 횃불(봉화)가 타오르고 동시에 천안뿐만이 아니라 진천,안성,연기,
청주 등 무려 24군데서 활활 봉화가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3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대한민국만세의 함성을 터트립니다.
이건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우리가 잘 아는 유관순
소녀 열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우내 만세사건이 일이나기 3일전 소녀 유관순 열사는 자기집 생가가 있는 자기집
뒷동산 봉화가 타올랐던 매봉산에 올라가 사흘간 특별한 기도를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 산에 올라가 사흘간 기도했던 소녀 유관순의 기도문의 부분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왜를 물치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땅이
행복한 땅이 되게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소녀에도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모든일이 평화속에 진행되게 하옵소서!)
어떤 증언에 의하면 이 산정에서 소녀 유관순이 기도할때 그녀는 방언으로 기도했다고 역사적
기록속에 남아있습니다. 친척되는 분이 가까이서 함께 기도했는 데유관순이 하던 기도가
한국말이 아니더래요. 나중에 알았는데 그것이 방언기도라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우내 만세운동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유관순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것을 볼 수 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관순의 아버지 유종건 어머니 이소재등 19분이 순국하게 됩니다.
그리고 30명이 그 자리에서 잡혀 부상당하였고 소녀 유관순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견디면서도
오히려 일제를 꾸짖고 민족통일의 당위성을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단순히 그냥 인간적 용기의 발로였을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책 역사가들도
무시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 담대함은 기도로 얻은 성령의 권능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었다고.
한건의 일본 경찰들을 향한 위한 사건도 없었고 한건의 방화사건도 없었고 질서 정연한 평화로운
시위 이것은 두려움을 넘어선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도의 열매였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권능 성령의 권능이 함께한 까닭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두려움의 정황들을 바라보십시요.
우리가 대선을 앞두고 있지만 우리가 신뢰할 만한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 우리는
역사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언제라도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위기의 현실이고
코로나는 끝이 보이지 않고 우리의 사업과 가정을 위협하고 우리는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의 현실 한복판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두려움을 넘어선 평화를 붙잡고 살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정치가 아니고 정치가 해답을 주는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달려나가 기도했던
유관순처럼 우리도 주 앞에 나가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고
죽으신 예수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 예수가 해답이십니다.
솔직히 우리는 누가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가장 최선의 지도자인가 우리의 판단은 얼마든지
틀릴 수 가 있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고 그분만이 우리 미래를 인도할 수 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섬리 그분의 인도가 해답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의 자리에 오셔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가 들을 수 가 있어야 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가 말씀하시면 평화가 올것이고 한반도에 평화가 올것입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하면 거기에도 평화가 올것입니다 이 어려운 때에 무릎꿇어
기도하고 평화의 응답을 경험하고 평화의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평화가 임할지어다! 그 평화가 우리 가정에 우리 일터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 북녘땅에도 저 우크라이나 땅에도 그 부활하신 주님이 평화가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뉴스에서 우크라이나 어린아이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 지하 대피처에서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의 얼굴 국경을 넘기 위해서 자동차로 걸어서 국경을 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우리는 이미 6.25때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은 지금도 이땅에서 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거 정말 이땅에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가 세워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도록 그리고 평화의 복음이 우리를
통해 전 세계에 증거될 수 있는 그리고 이 복음의 자유가 훼손되지 않고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이나라
이강토 이 산이 되도록 하나님 역사하여 주소서!.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지도자가 이 땅에 새워지게 도와주시옵소서
그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성령의 분별력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평화의 영으로 오시고 살아계셔서 우리를 역사하시는 주님! 살아계신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두려움을 넘어서 평화의 땅에서 평화의 복음을 증언할 수 있는 이 특권과 이 자유가 군건히 지켜질 수
있도록 성령님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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