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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살찌우는 글들/믿음 의 글들

140년전 선교사들이 뿌린 씨앗 대한민국 성장 밑거름

by 밝은 미소 2025. 3. 30.

 

 

 

 

 

 

1897년 에드워드 폴링(1864~1960) 선교사가 세운

논산시 강경읍 "ㄱ자형 교회(구 강경침례교회)는

한국 침례교가 처음 시작된 곳".

당시 강경은 금강을 통해 서해의 수산물과

호남의 쌀 등 곡물. 중국의 물산까지 드나들던

대표적인 포구로배가 하루 100척 넘게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런 입지 조건으로 강경은 충청지역 선교거점으로

자리 잡았고,이후 1906년 국내 침례회최초의 총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곳은 내가 다니는 침례교회가 한국에 최초로 새워진 곳이다.

 

한국개신교가 1895년 4월 아펜젤러선교사

(마국 북감리교)와 언더우드 선교사 (미 북장로회)가

들어오시고 1897년 에드워드 폴링 선교사가

세운 논산 강경침례교가 처음 시작된 이곳을

지난 2019년 10월10일 내가 다니고 있는
침례교회 역사를 찾아서 탐방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일찍 들어와서

농촌으로 갈 수 록 장로교회가 많지만 논산에

처음으로 침례교회가 세워져서 특히 논산,부여,공주

쪽에 농촌지역도 침례교회가 많이 있어 우리 고향

공주 정안도 동네에 교회가 하나 있는데 침례교회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침례교회의 역사를 찾아서 

이곳을 탐방하였는데 강경침례교회

담임목사님께서 교회역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는 것을 듣고 있는 함께간 교인들이다.

 

 

 

전도사님 얼굴은 안보이게

 

 

 

 

 

한교총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 탐방

 

"1906년 푸랭클린 윌리엄스 선교사(1833~1`962)가 충남 공주에 기독교 사립학교를

세웁니다.8년 후인 1914년 이 학교에 당시 12세이던 유관순 열사가 입합을 한다.

100여 년전 이땅에 선교사들이 뿌린 씨앗은 그렇게 대한민국이 독립하고 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행을 끼쳤습니다." (서민철 한국선교 유적연구회장)

한국 기독교 14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대표회장 김종혁 목사) 지두부가

3월 24,25일 전북 군산,충남 논산,공주 일대의 기독교 근대 문화유산 탐방에 나섰다.

한국 개신교계는 140년전인 1895년 4월 아펜젤러 선교사(1858~1902 미국북감리회)와

언더우드 선교사(1859~1916 미국북장로회)가 인천항에 도착한 때부터 한국 선교사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1897년 에드워드 폴링(1864~1960) 선교사가 세운 논산시 강경읍 'ㄱ자형 교회

(구 강경 침례교회)는 한국 침례교가 처음 시작된 곳. 당시 강경은 금강을 통해

서해의 수산물과 호남의 쌀 등 곡물. 중국의 물산까지 드나들던 대표적인 포구로

배가 하루 100척 넘게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런 입지 조건으로 강경은 충청지역 선교거점으로 자리 잡았고,이후 1906년

국내 침례회 최초의 총회가 열리기도 했다.

 

군산지역 선교는1895년 봄 윌리엄 전킨(1865~1908),알렉산드로 드루(1859~1926)

선교사가 초가집 두 채를 구입해 예배와 진료를 시작하면서 출발했다.

1899년 당시 '궁멀'이라 불리덙 곳에 궁멀교회(현 구암교회)를 세은 전킨 선교사는

이후 멜볼단요학교,영명 남학교 (현 군산제일중고교),군산 예수병원 등을 잇달아

설립했다.

군산을 넘어 전북 지역 선교의 뿌리를 내리게 한 전킨 선교사는 이곳에서 세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었다.그 자신은 미국에서 소천했지만,구암교회가 있는 궁멀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교총 지도부는 이 밖에도 전킨 선교사가 세워 인재 영성의 요람이 된 군산제일고,

6.25 전쟁 중 공산당에 의해 66명의 목사와 신자들이  순교한 논산 병촌성결교회,

시인 이상화,백범 김구,유관순 열사의 유물과 기록이 보존된 공주기독교 박물관

(옛 공주 제일감리교회)등을 답사하며 선인들이뜻과 넋울 기렸다.

행사를 주관한 소강석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대회 상임대회장(새에덴교회 담임목사)

은 "140년전 아펜젤러,언더우드 선교사의 입국으로 시작된 한국 기독교는 우리 사회의

교육,의료,독립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깊은 영행을 미쳤다"라며 과거를 통해 오늘을

비추는 것은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초석이 될 것 이라고 말했다. 

 

동아일보 군산.논산 이진구 기자 기사발췌.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이곳에는 조선 말 고종 때부터 한국을 위해 공헌한 

언론계,교육계,종교계, 외국인 인사들 500여명이 묻혀있는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외국인선교사와 그 가족 145명이 다른 이들과 함께 안장되어 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은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공원으로 ,양화나루

잠두봉 유적의 일부이고 조선시대 양화진(楊花津) 나루터를

수비하던 양화진영이 있던 곳으로1860년에 외국인 묘지로 조성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조선 말 고종 때부터 한국을 위해 공헌한 

언론계,교육계,종교계, 외국인 인사들 500여명이 묻혀있는데

 

양화진 외국인선교원에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우리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외국인선교사와 그 가족 145명이

다른 이들과 함께 안장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여 우리 사회 발전에 기여 하였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많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일해왔습니다.

이를 통해 뿌려진 복음의 씨앗이 한국 교회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대한민국 이 땅에서

신약이 이루어져 계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신 주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직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변방의 나라 한국에 들어와 풍토병과 싸우고

의사로서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을 포기하고

이 땅에 들어와서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나라의

선교사님들의 그 고귀한 피 흘림이 있었기에 오늘 날 우리는 

이렇게 편하게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병원,교회 등 우리나라 수많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펼치며 그분들의 생명의 피들이 밀알이 되어

그 씨앗들이 오늘날 대한민국 성장에 밑거름이 되어 주신 선교사님들.

 

오늘 날 그 예수님의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우리나라의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신

주님의 그 말씀을 들고 세계각국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다

생명까지 잃는 수 많은 선교사님들이 있습니다. 그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피 값이 헛되지 않게 오늘도 세계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해야 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해봅니다.

 

 

 

 

100주년 기념교회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을

관리하고 있는 100주년기념교회의 전경

 

 

(1856~1890)

 

제중원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잘 알려진

헤론 선교사의 가족묘입니다.

헤론은 양화진에 처음 안장된 선교사입니다.

 

1885년 6월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알렌,

언더우드와 함께 제중원에서 의사로 일했습니다.

열악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인들을

돌보던 헤론은 자신도 이질에 걸려

한국에 온지 5년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헤론의 죽음이 양화진이 선교사묘원이 되는 동기가 되었답니다.

 

 

(1883,1,28-1908,6,19)

 

내게 줄 수 있는 천 번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천번의 

삶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루비 켄드릭

선교사의 조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글이다.

 

루비 켄드릭 선교사는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사로

캔자스에 있는 부인성경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05년 6월에 졸업하고 한국 선교를

지원했으나 연령 미달로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마침내 2년 뒤 1907년 9월 텍사스주 엡윗 청년회의

후원을 얻어 남감리회 해외여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한국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처음 임지는 개성으로, 한국어를 배우면서 사역을 시작했다.

 어학공부를 하던 중 애석하게도 내한한지 9개월이 못되는

1908년 6월19일 맹장염으로 사망하여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1858~1902)

 

조선선교를 위해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자마자 드렸던

기도로 유명한 아펜젤러의 가족의 묘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1858년 4월 5일 제물포에 상륙한 첫 기도.

 

아펜젤러는 한국 감리교회의 초석을 놓은 선교사입니다.

그가 세운 배재학당은 복음의 가치관 위에서

민족을 섬긴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감리교회를

설립하였고 한글성경번역에도 참여 하였습니다.

1902년 성경번역위원회 참석차 목포로 가던중 배가 침몰해 순직하였습니다.

 

 

 

(1865-1951)

 

폐결핵환자들을 위해 처음으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한 셔우드 훌 가족의묘입니다.

훌은 의료선교사로 남편과 딸을 잃는

고통과 아픔속에서도 45년동안

한국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아들셔우드 훌은 해주에 요양원을 세워

결핵환자들을 치료하였고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여 결핵에 대한 계몽운동을 벌였습니다.

양화진에는 3대에 걸쳐 6명(선교사4명)의 훌 가족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1832-1929)

 

지금의 이화여대를 설립한 스트랜턴 대부인의 묘입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이화학당을 설립한 근대여성교육의 선구자입니다.

53세되던 1885년 외아들 내외와 조선에 첫 발을 디딛고
이화학당을 열어 많은 여성들을 가르쳤으며

전도 부인회를 조직하여 여성들에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조선의 여성들을 위해서 헌신하다가 77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865-1949)

평양원산부흥회의 주역으로 우리에게 친근하게 알려진

하디의 기념비입니다.

하디는 토론토 의대 출신의 의료선교사로 25세 때

 한국에 처음온 그는 평양대부흥회의

시발점이 된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감리교신학교 협성신학교 등에서 가르치다가

1935년 은퇴하였고 양화진에는 하디의 두 딸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