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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전라남도

담양 소쇄원의 풍경들

by 밝은 미소 2023. 1. 27.

소쇄원 광풍각(光風閣)

 

 

소쇄원(瀟灑園) 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원림園林으로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조성한 것으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를 당하여 죽게 되자

출세에 뜻을 버리고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소쇄원이라 한 것은 양산보의 호 인 소쇄옹(瀟灑翁)에서

 비롯되었으며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오곡문(五曲門) 담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 물은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지고, 계곡 가까이에는

제월당(濟月堂: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집 과 광풍각(光風閣:비 온 뒤에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의 사랑방 이 들어서 있다.

 

소쇄원에는 영조31년 1755년 당시 모습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어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하다.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에 의해 보수된 모습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소쇄원 들어가는 입구에 양쪽으로 대나무가 쭉쭉 뻗어있는 모습

 

 

 

 

 

 

 

 

 

 

 

 

들어가는 입구에 작은 초가지붕의 정자가 있다.

2019년 가을날 이곳에 왔던 날은

이 정자에 사람들이 누워 있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는데 

이날은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사람들도 없고 아주  조용하고 한적한 모습이다.

 

 

 

2019년 가을날 왔을 때는 정자의

초가지붕이 괜찮았는데

그동안 지붕을 새로

올리지 않았는지 군데군데

흘러내리고 지붕에서

풀이 자라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오곡문 담밑구멍으로 흘러 들어오는 계곡물은 바로 이곳을 지나

바로 아래 암반을 거쳐 폭포를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흙담벼락에 달린 오곡문을 나가서 바라보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담밑으로 난

두 개의 구멍인데 보면 볼 수 록 낭만적인 멋스러움이 스며있다.

 

 

 

 

 

 

우물 안 모습

 

 

우물을 지나 산으로 나있는 길

 

 

오곡문 바깥 담장풍경

 

 

 

 

 

오곡문구역은 오곡문 옆의 담밑구멍으로 흘러 들어오는 계류와 주변의 넓은 암반이 있는 공간을 말한다.

계류의 물이 들어오는 수문 구실을 하는 담 아래의 구멍은 돌을 괴어 만든 높이 1.5m, 

너비 1.8m와1.5m의 크기를 가지는 두 개의 구멍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낭만적인 멋은 계류공간의 생김새와 잘 어울린다.

이와 비숫한 기법은 1100년대(숙종연간)의 이 실충(李實忠)이

만든 경기도 부천의 척서정(滌暑亭)에 서 볼 수 있다.

 

오곡문의 '오곡'이란 주변의 암반 위에 계류가 之자모양으로

다섯 번을 돌아 흘러 내려간다는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이 부근의 암반은  반반하고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물가에 앉아서 즐기기에 넉넉한데, (소쇄원도)에는

한편에서는 바둑을 두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야금을 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오곡문아래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난 구멍에 마음을 빼앗겨서

담장 밖으로 나가서

사진을 담고 담장

안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니 

아직 남아 있는 단풍이 눈이 부시도록 곱다.

 

 

오곡문옆 담장 아래로 난 계류의 물이 들어오는 수문 구실을 하는

담 아래의 구멍은 돌을 괴어 만든 높이 1.5m, 

너비 1.8m와1.5m의 크기를 가지는 두 개의 

구멍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낭만적인 멋은 

계류공간의 생김새와 잘 어울린다.

이와 비숫한 기법은 1100년대(숙종연간)의

이 실충(李實忠)이 경기도 부천의 척서정(滌暑亭)에 서 볼 수 있다.

 

 

 

오곡문의 '오곡'이란 주변의 암반 위에 계류가 之자모양으로

다섯 번을 돌아 흘러 내려간다는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이 부근의 암반은  반반하고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물가에 앉아서 즐기기에 넉넉한데, (소쇄원도)에는

한편에서는 바둑을 두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야금을 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오른쪽으로는 제월당이 있고

왼쪽으로는 광풍각으로

내려가기 전 담장을 끼고

단풍이 물들어있는 모습이 곱다.

 

 

 

 

 

광풍각이 손님들과 담소하던 사랑이라면

제월당은 주인의 독서 공간이다.

제월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팔작지붕으로 그중 바라보기에

왼쪽 한 칸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높다란 대를 쌓고 시원하게

앉힌 건물은 소쇄원의 중심 공간이다.

'제월당'이라고 호방하게 쓴 우암

송시열의 글씨에서 당대 풍류를 여실히 보여준다.

 

 

 

'제월당' 편액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고 한다.

 

 

 

 

 

 

 

 

 

 

 

 

 

 

 

 

 

제월당 옆에 있는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익어가고 있고

 

 

담장 밖에서 바라본 '제월당' 모습

 

 

제월당에서 이문을 나서서 

돌계단을 내려서면

 광풍각(光風閣)으로 갈 수 있다.

 

 

 

 

 

광풍각(光風閣) 지붕이 보인다.

 

 

광풍각에서 제월당으로 오르는 돌계단

 

 

 

 

 

 

 

 

광풍각(光風閣) 계단에서 바라본 곱게 물든 감나무 단풍.

 

 

광풍각(光風閣)으로 들어가기 전 풍경들.

 

 

광풍각(光風閣)

 

광풍각구역은 제월당구역의 아래쪽에 있는 광풍각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방 기능의 공간이다.

광풍각 옆의 암반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는데, 이러한조경방법은 고려시대의

정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광풍각의 뒤쪽에 있는 동산을 

복사동산이라 하여 도잠(陶潛)의 무릉도원을 재현하려고 하였다.

 

제월당의 '제월'과 광풍각의 '광풍'은 송나라의

황정견(黃庭堅)이 유학자 주돈이(周敦肄)의

사람됨을 평하여 "흉회쇄락여광풍제월(胸懷灑落如光風霽月)"

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소쇄원의  조경식물로는 소나무, 단풍나무, 버드나무, 참등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벽오동나무, 배롱나무, 회화나무,

치자나무, 사계화나무, 국화. 파초. 연꽃. 철쭉. 동백. 측백나무 등을 심었다.

 

이들 가운데 소나무와 매화나무 대나무는 국화와 함께

사절우(四節友)라 하여 선비들이 즐겨 심었던 것이며,

측백나무는 주나라 때 왕자의 기념식수로, 회나무는

고관들의 기념식수로 쓰이던 나무들로, 그

풍습에 따라 자손이 성공하기를 비는 뜻으로 심었다.

현재는 당시에 심은 나무들 가운데 소나무, 측백나무, 배롱나무 몇 그루가 남아 있을 뿐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오곡문(五曲門) 담장 밑으로 계류의 물이 들어오는

수문 구실을 하는 담 아래의 돌을 괴어 만든

높이 1.5m, 너비 1.8m와 1.5m의 크기를

가지는 두 개의 구멍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 물은 큰 바위를 타고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지고 이 광풍각(光風閣) 아래로 흘러서

내려가고 있는데 여름 장마철에 오면

폭포가 되어 흐르는 물이 아주 멋스러운 풍경을 만들어 줄 듯하다.

 

 

 

 

 

 

 

 

 

 

 

 

 

 

 

소쇄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면서 아쉬워서

다시 한번 바라본  광풍각(光風閣)

 

 

소쇄원의 특징: 소쇄원은 계류를 중심으로 하여 좌우의 언덕에

                          복사나무 배롱나무 등을 심어 철 따라 꽃을

                          피우게 하였으며, 광풍각 앞을 흘러내리는

                          계류와 자연폭포,그리고 물레방아에서

                          쏟아지는 인공폭포 등 자연과 인공이

                          오묘하게 조화되어 속세를 벗어난 신선의

                          경지를 방불하게 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 이신 묵객 문사들의 방문이 그치지 

                          않았던 곳이었으며, 그들이 남긴 詩들이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의의와 평가:  소쇄원은 보길도의 부용동원림과 더불어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별서(別墅.

                         농장이나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 정원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역사적 변천"

소쇄원(瀟灑園)은 양산보가 은사 조광조(趙光組)가 남곤(南袞)등의 훈구파에게서 몰려

전라남도 화순 능주로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향리인 지석마을에 숨어

살면서 계곡을 중심으로 조영한 원림(園林)이다, 양산보(梁山甫)의 은둔생활(隱遁生活)

기간 중인 1520년부터 1557년 사이에 조성된 것이다.

 

소쇄원의 "소쇄"는 본래 공덕장(孔德璋)의(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써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하고 있으며, 양산보는 이러한 명칭을 붙인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 하였다.

 

소쇄원의 조성사상을 보면 주자 9朱子)가 중국(中國) 송안현(崇安縣) 계곡의

경승지인 무이구곡(武荑九曲)에 무이정사(武荑精舍)를 짓고 현실(現實)을

도피하여 운둔하는 행동양식이 깔려 있다.

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80년쯤 전에 충수 하여 현재 2동이 남아 있다.

 

한편, 소쇄원에는 김인후 9金麟厚)가 1548년(명종 3)에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의

48명(詠) 시(詩)가 남아 있다.

그리고 고경명(高命)이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광주목사(光州牧使)

임훈(林薰)과 함께 광주 무등산(無等山)을 유락(遊樂)하면서 4월 23일 소쇄원에

들려서 보았던 계원(溪園)의 사실적 묘사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남아있다.

 

또 소쇄원의 배치를 목판9木板)으로 새긴 <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다.

이 목판은 가로가 35cm, 세로가 25cm로 양각으로 판각되었는데 1755년 4월 하순

(숭정기원후 삼을해년청화 하완간(崇禎記元後 三之亥年淸和 下源刊)에 제작했다는

판각기가 새겨있어 소쇄원의 원형(源刑)을 상고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목판에는 위쪽에 김인후의 소쇄원 48제영(瀟灑園 48題詠)이 새겨있고 오른쪽

외곽에는<창암촌 고암동 소쇄원 제월당 광풍각 오곡문 애양단 옹정봉 황금정유

우암선생필(창蒼巖村 鼓巖洞 瀟灑園 濟月堂 光風閣 五曲門 愛陽壇 待鳳臺 瓮井峰

黃金亭 有 尤菴先生筆)이라 새겨있다.

우암(尤菴)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호이다. 이 소쇄원도(瀟灑園圖)에는 건물의 명칭

식물의 명칭 지당(池塘) 계류의 조담(槽潭)이나 바위 다리 물레방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입구 담벼락에는 원래 김인후의 소쇄원 48 영(詠) 수제(手題)가 편액으로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우리가 들어올 때는 이른 시간이라서

사람들이 거의 없었는데 소쇄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다 보니

단체관광객들이 몰려와서 

이 길을 꽉 메우더니 다 지나가고

몇 사람만 보이는 입구 대나무 숲길이다.

 

 

 

 

 

 

2022년 11월 8일 담양 소쇄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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