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강원도

강원도 (여행지에서 만난 김삿갓 과 孤山 尹善道 詩碑.)

by 밝은 미소 2006. 11. 5.
 

 

 

 

 

 

 

 

 

 

 

 

 

 

 

 

 

 

 

 

 

 

 

 

 

 

 

 

 

 

 

 

 

 

 

 

 

                   

 

 

 

 

 

 

 

 

 

 

 

 

 

 

 

 

 

 

 

 

 

 

 

 

 

 

 

 

 

 

 

김입(金笠)1807~1863년 (순조7~철종)조선시대의
방랑시인 본명(炳淵) 속칭 김삿갓 자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 본관(安東) 경기도 양주(楊州)출신
1811년 (순조11)(홍경래의 난)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익순(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폐족(廢族)이 되었다.
당시 6세이던 그는 형 병하와 함께 종이던 김성수 의
구원으로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 거기서 공부를 하며
성장하였다.
 
뒤에 사면을 받고 고향에 돌아왔으나
 폐족자에 대한 천대가 심하고 벼슬길도 막혀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하였다.
 
그는 즐겨 큰 삿갓을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녔으므로  삿갓이라는 별명도
 여기서 생겼는데 전국을 방랑하면서
도처에서 즉흥시를 남겼다.
 
그의 詩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고 또 그런 작품에 뛰어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리고 있다.
 
아들로부터 여러차례 귀가를 권유받았으나
 방랑을 계속하여
전라도 동복(同福 화순군)에서 객사하였는데
작은 아들이 강원도 영월 지금의 자리에 묻었다.
작품에 ((김입시집(金笠詩集) ))이 있다.
 
 
 
孤山尹善道 1587~1671(선조20~현종12 )조선시대의
 문신. 시인. 자 약이(約而)  호(孤山) 해옹 (海翁)
시호 충헌(忠憲) 본관(海南)
 
1612년 (광해군4) 진사가 되고 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 이이첨 등의 횡포로 상소했다가
경원등지에 유배되었다.
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것을
모두 사퇴했다.
28년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되어 봉림대군 을 보도 했다.
29년 형조정랑 등을 거쳐 32년 한성부서윤 을
지내고 33년 중광문과 에 급제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52년 (효종3)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 등에 이르렀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57년 침지중추부사에
복직되었다 .
58년 동부승지 때 남인 정개청 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가지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에 유배당하였다.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우리말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鄭澈) 의 가사(歌辭) 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75년(숙종1)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이 되어
이조판서에 추증, 저서에  고산유고(( 孤山遺稿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