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라(9)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구원의 투구와 말씀의 검.
2020년 11/18(향기로운 수요예배)/본문에베소서6:13-17/설교: 최성은 담임목사.
말씀본문 (에베소서 6:13-17)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진리의 허리띠 2) 의의흉배 호신경 3)평안의 복음의 신발 4)믿음의 방패
5)구원의 투구6)말씀의 검
구원에 대한 세 가지 오해.
첫 번째 오해: 우리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 잘 모르고 하나님 만이 아신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오해하는 분들이 간혹있다.
구원은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말한다.
구원은 나의 죄가 사함을 받은 것을 말한다.
구원은 어둠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말한다.
구원은 불분명한것이 아니다. 내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는지 아닌지 불분명한게 아니다.
니고데모는 이것이 확실하지 않아서 주님을 찾아왔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 내가 지금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면
그리고 죄용서함 확신에 관한것을 확실하게 가르치는 종교가 기독교인데 죄사함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가 불분명하다면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선언하시는것 내딸이야 내 아들이야 건드리지마 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서 당시에 세계최고의 강국인 이집트 앞에서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은
확실한 것이다 내자녀야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것을 모른다면 이것은 문제가 있는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선지자를 통하여 탄식하시는 장면
이사야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이사야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것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하나님 아버지는 나에 대해 확실하시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로써 백성으로써 내가 구원받았는지
죄사함을 받았는지 구원의 확신은 내가 죽어봐야 안다고 주장하는것은 성경이 어떻게 이야기
하는것을 보지 않고 내생각과 세상의 생각과 포스트모던의 생각을 이야기 하는것이다.
성경은 그렇지 않다 최소한 성경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얼마나 성경이 강력하게 우리를
하나님께서 죄에서 새생명으로 새사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이끌어 주셨는지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의 탄식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알아본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알아본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는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똑같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셨다.
그러니까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내가 몇번 경험한것인데 열심히 신앙생활도 하시고 직분도 권사님이신데 정말 열심히 섬기셨고
기도도 잘하시고 누가 보드라도 신앙적으로 괜찮은 분이셨는데 마지막 돌아가실때 권사님 이제
천국가셔야죠 라고 격려를 해드렸는데 그 권사님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나는 천국 못가요.
너무 지은죄가 많아서 그래서 그 뒤로는 돌아가실때 꼭 구원의 확신을 점검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것인지 정말 구원이라는것이 무엇인지 저는 이런것들 때문에 이단이
나온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거할때 특별히 다른 여러가지 이야기들도 많겠지만 고린도후서
13:5을 꼭 기억하고 이 말씀을 제시했으면 좋겠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신앙은 사랑에 관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안하느냐 남편을 사랑하느냐 안하느냐다.
결혼하고 확증하고 다 선언 했는데 이제와서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모른다 이런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셔서 십자가 못박으셔서 제시를 하셨는데 하나님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아직 구원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오해: 구원은 없어질 수 있으니까 잘 간직하라.
우리가 구원에 있어서 죽을때 까지 분명해야 되는것은 구원은 나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엡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자랑치 말라고 하심
거기에 대한 자녀로써 자부심 감사함 확증은 갖지만 자랑은 말라고 하신 주님의 의미는 내 공로로
구원이 온것이 아니라는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은 없어질 수 있으니 잘 간직하라는 이 의미는 뭐가 되느냐면
구원이라는것이 내 공로로 얻은것 처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어떤 폐단이 있냐면
내 죄가 십자가의 능력보다 더 클 수도 있는 것이다. 십자가가 어떠한 죄를 못 덮겠는가!
만약 내가 한번 받은 구원을 빼앗긴다면 그 십자가의 능력은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을 우리가 잘 기억한다 로마서 8장을 구원에 대한 확신가운데 에서 많이 읽어보면 좋겠다.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성경은 여러 구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한번 들어온 영혼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세번째 오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니까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
예수그리스도 보혈로 정말 거듭났다면 그 구원의 능력과 효력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점은 분명하게 성경이 선포를 한다. 그런데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제부터 막살지 않는다. 죄를 탐닉하는 죄인과 정말 죄를 안지으려고 하다가 허물을 보이는
죄인은 다르다.
그것이 베드로와 가롯유다의 차이점이다. 이 세상에는 두가지의 죄인밖에 없다 회개한 죄인과
회개하지 않은 죄인이다.
내가 어떠한 상황가운데에서 어떠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것을 경험한 사람은 막 살려고
하지 않는다. 막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막 판단하려고 하지 않는다 막 다른사람을
정죄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사람들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을
경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화되는 삶을 살았지만 내 자신이 죄인중에 괴수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바울.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받아들일때 죄인으로 인정해 주셨지만 사도바울의 서신서들을
보면 그 확신과 더불어서 자신이 동시에 죄인임을 고백한다. 내 공로로 구원을 받은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허물을 보이고 죄가운데 살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삼아주신것은 시간과 공간과 모든것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과거에 지은 죄 그리고 지금 짓고 있는 죄 그리고 미래에 지을 죄까지 다 용서하신 것이다.
우리는 시간가운데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시간을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앞으로 지을 모든 죄들까지 다 보시고 용서를 하신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구원의 은혜라는 이 사실 내 공로가 아닌 사실을 여전히 깨달을 때만 성화의 과정도
변화되는 과정도 하나님의 은혜가은데 이루어질 수 있는것이다.
하니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내 딸아 내 아들아 내 자녀야 너는 이제부터 의인이야 라는 이 음성을 듣는
하나님의 백성은 도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나의 나 된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이 고백이 사실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러주셔서
의인인것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겠지만 하나님 저는요 여전히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할 수 없는
괴수 중에 죄인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 구원의 확신과 동시에 늘 겸손하게 살아가는 이 균형의 모습이
정말 구원받은 백성들 가운데 저와 여러분의 삶가운데 충만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가 잘알고 있는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J.Newton은 평생을 노예상인으로 살았다. 사람들을 잡아다가
그 과정가운데서 죽이기도 했으니 예수님을 영접하고 얼마나 그 마음가운데 회개가 들었겠는가!
죽을때 까지 회개를 하는것이다 그래서 이 찬양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이사람이 구원의 확신이 없는가 아니다 너무나도 확실하다 너무나도 큰 확신이 이
찬양가운데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이 우리에게 또다른 은혜를 주는 것이다.
구원의 신발이 우리에게 안정감과 평안을 준다면 믿음의 방패는 사탄이 우리의 감정을 공격하는것에
대해서 특별히 우리를 보호한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는 우리의 지성을 보호한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것이다. 한번 천국 시민권이 된
사람은 영훤한 시민권이다
이 구원에 대한 확신은 우리 머리속에서 영원히 보호해야 되는 지식과 이성의 보화이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이 구원의 투구를 쓰고 있어야 한다. 잠을 자든지 아니면 여가시간이든지 항상
우리는 이 투구를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우리의 머리에서 벗어서는 안된다.
이 구원의 투구를 쓰고 우리를 정죄하는 사탄의 공격에 맞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6) 하나님의 전신갑주 -말씀의 검.
철학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요즘은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런 이야기가 생겨났다.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예전에는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 누구를 만나느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라고 하였다면 지금은
어디를 접속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특히 우리 자녀들이 어디를 잘못 클릭했다가 인생이 망가진다
그래서 자녀들을 가진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보지 말아야 할 영상 접속해서는 안되는 싸이트 이런것들을
가이드 해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다.
10년전에 어떤 통계를 보니 핸드폰 보급율이 한국이 세계 1위이다. 핸드폰은 우리의 몸의 일부가 되었다
핸드폰은 우리의 족쇄이다 이 핸드폰이 잘못 사용하면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지만 그러나 이 핸드폰의
활용성과 중요성을 우리가 안다면 영적 전쟁에 괭장히 중요하게 활용할 수 있다.
여러분 NCC기도제목을 받으실때도 핸드폰 문자를 통해서 받는다 그리고 에배를 드릴때도 영상으로
보시는 분들이 많다.
영국 크리스티의 보고에 의하면 핸드폰으로 성경을 보는 웹이 열배가 증가했다고 한다. 이 시대 위로받기 위해
성경을 읽고 찬양을 듣는다 핸드폰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터부시해서 인터넷 공간을
사탄에게 넘겨 주었는데 이것을 우리가 탈환해야 한다 우리 선교사님들도 이곳에 계시지만 선교사님들 만큼
인터넷과 핸드폰을 잘 활용하는 분들이 없다.
우리는 요즘 줌을 사용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핍박받는 지역에서나 창조적인 지역에서는 인터넷과 핸드폰
이런 문명의 기를 잘 활용을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문명의 기기를 통하여 특히 말씀의 검을 잘 활용해야 한다.
6) 1)진리의 허리띠 2) 의의흉배 호신경 3)평안의 복음의 신발 4)믿음의 방패 5)구원의 투구
지금까지 배운것은 어쩌면 수비를 하는 무기들이다. 이제 말씀드리는 3가지는 공격무기이다.
그중에 1)말씀의 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 중 첫번째 공격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의 칼:마카이라(칼), 투 프뉴 마토스(성령의)-성령이 주시는 칼"
하나님의 말씀의 기원은 성령이라는 것이다 말씀사역과 성령사역은 따로가는것이 아니다
같이가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있고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성령께서 그것을 밝히 깨닫게
하시는 역사가 없으면 우리는 말씀을 보고 배워도 점점 율법주의로 갈 수 있고 잘못 활용을 할 수 가 있다.
성령께서 그 말씀을 밝히 우리가운데 깨닫게 해주셔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들어나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그래서 조금 어려운 신학적인 용어로 우리는 조명하시는
사역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진실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다라고 이야길 하신다.
이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말씀에서 특히 14~ 15~16장에서 말씀하시는데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일을 감당을 하시고 그리고 성령님을 예비하셨는데 성령님은
오셔서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하신 말씀과 사역들에 대해서 다시한번 섬기시는 사역을 하신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써 성부 성자 성령으로써 서로를 도우시고
협력하시고 빛내주시는 사역을 하시면서 하나의 하나님으로써 공동체로 존재하시면서 어떻게 우리가
교회의 몸으로써 이끌어 나가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인데 이것을 밝히 이야기하는 책이 바로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에베소서이다.
그런데 특별히 에베소서 마지막에서 공격무기로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성령님의 사역이 말씀의
사역이라는것을 이야기한다. 성령님의 사역은 말씀 사역을 뜻하고 말씀 사역은 곧 성령님의 사역을
하는것임을 동일하게 이야기한다.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성령님의 역할을 분명하게
이야기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와 영적 전쟁과 우리의 삶에 있어서 특별히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가 깨닫게
되는것이다.이 모든 사역을 깨닫는 사역이 특별히 성령님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특별히 오늘 본문말씀 가운데서 왜 하나님의 말씀을 로마 군사들의 칼에 비유를 했을까
생각해 보길 원한다.
여기서 말하는 로마 군병단이 쓰는 칼은 우리가 조선시대에 썼던 한면만 날이 있는 길게 있는
그런 칼이 아니다. 로마 군병단이 그 당시 전쟁에 쓰던 칼은 양쪽에 날이 선 글라디오스라는 칼인데
길이가 약 65cm 폭은 5cm 무게는 약 700g정도 단도보다는 조금 더 길고 긴 칼보다는 작은
그런 칼이다. 그런데 이 칼의 용도는 접근하는 상대방을 믿음의 방패를 들고 상대를 찌르기 위함이다.
로마사람들이 다른 이방민족과 싸움을 할때 다른 민족들도 투구나 갑옷을 입었을때 베기를 해서는
전쟁이 잘 안된다 왜냐면 두꺼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방패를 들고 적진을 하면서 그 사이를 파고
들어가서 몸을 보호하지 않은 부분을 찌르는것이다. 실제 역사속에서 주후 367년에 로마랑
갈리아인들이 엄청난 전쟁을 벌렸다.
갈리아인들이 무섭고 사기가 충천하고 키도 큰 그런민족이었는데 그들은 무기를 가지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는데 로마군병들은 괭장히 조직적이게 칼을 크게 휘두르지도 않으면서 방패를 들고 적진을
하면서 보이는 사이로 상대를 찌르는 것이다. 전쟁에서 큰 힘을 쓰지 않으면서도 전쟁의 승리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군인의 전통이 되었다.
사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약점을 찾아서 노리고 파상공격을 해올때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옷의
호신경으로 딱 하나님이 입혀주신 진리의 말씀과 의의 호신경을 통하여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쳐주시는
말씀가운데 그리고 우리가 배운것 처럼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어떤 강력한 전투에도 평강함을 잃지 않고
성령의 검 말씀의 검을 들고 공격하는 것인데 로마군병들처럼 몸을 낮추고 자세를 낮추고 오히려 사탄의
약점을 찾아서 말씀의 검으로 우리가 사탄을 대적해서 승리를 하는 것이다.
영적 전쟁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신 이 무기들을 로마군병들에 사도바울이 비유를 했다는 것은 괭장히
상징적인 의미들이 많이 있다 이것을 단지 상징적인 의미라 생각하지 말고 실제적으로 영적전쟁에서 우리가
어떻게 적용해야 되는지 이 상징적인 것들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말씀의 검으로 무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성경을 공부해야한다 말씀을 묵상해야 된다 말씀을 암송해야 된다 맞다.
어느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했는데 부흥회때 어느 한분이 나와서 대표 기도를 하셨는데 그분이 성경을 달달
암송을 하는데 특히 로마서 8장 로마서를 가지고 암송을 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부흥회가 끝나고 그 교회에 큰 문제가 생긴것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는데 그분이 그 문제 핵심가운데
계신분이었다.
여러분 성경을 달달 암송을 한다고 사람의 인격이 변화되는것이 아니다 QT를 매일 묵상을 한다고 사람이
변화되는것이 아니다. 이것을 무시하는것이 아니다 말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 말씀 암송 말씀 통독
여러분 말씀 50번을 읽고도 구원의 확신이 뭔지 모르고 성경을 100번을 통달을 해도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게 바리세인의 모습이었고 사두개인들의 모습이었다.
성경을 달달 통독을 해도 인격이 변화되지 않고 사람들을 용납할 수 없는그것은 왜일까?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검의 의미가 무엇일까?
우리는 말씀의 검하면 그걸 들고 사탄을 찌르고 사람들을 찌를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평생 잊지 못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의미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말씀의 검으로 내가 잘 무장하려면 영적전쟁에서 승리를 하려면 내가 먼저 이 칼에 죽어야 한다.
내가 먼저 이 말씀앞에 죽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단순한 말씀 묵상이 아니다 단순히 다른사람 앞에 잘 보일려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와 본질을 잃어버린다면 말씀을 달달 묵상할 수 록 묵상을 잘 할 수 록
말씀을 잘 알 수 록 다른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데 쓰여질 뿐이다.
왜냐하면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 말씀은 먼저 그 말씀앞에 나를 세워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다른사람을 생각하기 전에 나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또 내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우리가 4:12절 말씀을 많이 암송하는데 4:13절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13절 말씀은 이 하나님 말씀앞에 우리가 들어나지 않은것이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벌거벗은 것처럼 하나님 말씀앞에 다 들어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대면하면서 내가 옷을 꽁꽁입고 무기를 들고 펼쳐지지 않으려고 내가 하는 그런
모습들을 볼때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들어난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칼로 수술하려고 하신다
모가 나는 부분들 딱 사탄한테 정죄받기에 합당한 그런 부분들 숨겨 놓은 죄들 그런것들을 하나님께서
수술해주시는것이다 말씀으로 내가 수술해야 그 글라디오스가 나의 칼이 되는 것이다 내가 말씀 가운데
먼저 들어나야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가운데 삶가운데 들어오시게 되는이다.
그래야 그 칼의 능력이 비로서 발휘가 되는것이다. 말씀은 능력이 있는것이다 어떠한 사람도 살릴 수 있다
어떤 영혼도 구원할 수 가 있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의 능력이 있는 그 칼을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역하게 하시려고 하실때 먼저 내가 하나님 말씀앞에 죽어야 한다.
새옷을 입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암송한 말씀이 묵상한 말씀이 자녀를 살리고
남편을 살리고 아내를 살리고 정말 예수님 믿을 거 같지 않던 영혼들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의 말씀으로 더욱 더
내 삶가운데 사역가운데 임하게 되는것이다. 말씀에 능력이 없는것이 아니라 칼을 쥐고 있는 내가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묵상을 하고 한 말씀이라도 외우고 통독을 한다면 내가 얼마만큼 인격이 변화되었는지를
점검해보면 된다.
여러분 조심해야 됩니다 내가 누구에게 가서 내가 말씀 10번 통독했어 그 의미는 내가 그 만큼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것이다 그러니까 그 자랑은 자랑임과 동시에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 간증하는 것이다.
성경을 100번을 통독을 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의 말과 언어와 행동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그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괴롭고 저것 해봐야 소용이 없구나 하고 역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
거기에 의미가 있는것이 아니다 정말로 그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 얼마나 나를 통과 하고 십자가가 나를
통과하고 그 말씀가운데서 내 인격이 변화되었는지 단 한 말씀이라도 그 말씀을 지킬려고 노력하는 그 사람의
애쓰는 모습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 말씀의 능력을 더하게 하시고 그 말씀 내가 받은 그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다.
영적인 전쟁에 있어서 말씀의 칼 앞에 내가 죽는다는것은 어떤 의미인가? 를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것이
야고보서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야고보서 4:6-7 말씀은 영적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신다.
야고보서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헤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쓰실 수가 없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 말씀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것이다.
거기서 겸손하고 순종함을 보여야 하는것이다 그 하나님 말씀이 나의 생각과 뜻과 혼과 영과 가치관과
결정관과 모든 육신의 모습들을 관통하실 수 있도록 그래서 치유받고 회복되고 그래서 그 말씀앞에
나를 비춰야 하는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의 칼로 내가 무장을 하게 되면 고린도후서 10:5절 말씀처럼 하나님 아는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것을 무너뜨리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놀라운 역사들이
내눈앞에 펼쳐지게 되는것이다.
고후10: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맹락이 에베소서 6장과 동일하다
고후10:3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나이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우리가 지난주부터 포스트모던 사상에 대해서 조금씩 보지만 모든 이론을 무너뜨니며 모든 철학과 모든
인간이 세웠던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러한 것들.
고후10:5 하나님 아는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후10장은 영적인 전쟁의 핵심적인 말씀인데 우리가 좋아하는것은 항상 그런 것이다
막 사탄에 견고한 진리를 파하고 웃기기 마라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은 그것을 할 수 있는 컨디션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이야길 하셨다.
고후10:6을 다시보라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여 질때 아무거나 휘두르지 말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그 말씀앞에 죽었나 이 이야기는 내가 그 하나님 말씀앞에 먼저 순종했는지를 보는것이다.
얼마나 오묘한 말씀인가!
고후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하나님은 준비되어 있으시다 그 말씀의 칼을 말씀의 능력을 우리의 손에 주시게 준비되어 있으신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는거다 "너는 준비되어있느냐"?
사실은 성령의 은사보다 더 중요한것은 성령의 열매이다 열매는 그 능력을 담는 그릇이다 은사를 담을
그릇이 준비가 되어있어야 되는데 그 그릇의 특징은 겸손 바로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고린도 후서
말씀은 순종이다. 나는 이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 한국사람은 전쟁을 좋아한다 모든걸 다 전쟁에 표현한다. 전쟁을 많이 겪은민족이라서 그렇다.
한국사람처럼 사진 찍을때 주먹을 쥐는 사람들은 없다 우리는 사진을 찍거나 무엇을 하려면 주먹을 쥔다.
전투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전투를 승리하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앞에 순종함과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되어 있을때 견고한 진을 파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씀이다.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를 할때 고린도교회에 여러가지 문제들이 많이 있었다.
고린도교회처럼 문제가 많은 교회가 없었다.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을때 교회를 감싸고 있던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교만하고 악한
영에 물든 복종치 않는 어둠에 대해서 준비되어 질 것이고 그 때에 비로써 견고한 진들을 파할 수 있는
강력한 역사들이 교회안에 일어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순종이 이루어지면 그 겸손함이 모든 성도들 가운데 임할때 말씀의 검의 능력이 준비되어 지고
교회를 새롭게 하고 교회를 revive하게 되고 vinu하게 되고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가운데 나가
세대를 분별하고 말씀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 있는 사조들을 분별하고 새롭게 하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들이 있게 될것이다.
나부터 그 말씀에 겸손하고 순종해야 하고 그 말씀을 가지고 공동체가 하나가 되고 서로를 긍휼이 여기고
그 사랑의 힘을 가지고 말씀의 검에 담아서 세상을 파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가 사랑하는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면이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딤후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가득한 보화이다.
말씀을 알지 못하니까 그런 이야기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거니까 나는 계속 죄를
지어도된다.라는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방자함이라든지 구원은 알 수 없는 거다 우리 인간이 죄인인데
죽어봐야 알지 라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극단적인 이런 모든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속에
나타난 구원의 보화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라고 말씀한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1)교훈과 2)책망과 3)바르게 함 과 4)의로 교육하기에
5)유익하니 비록 사람이 그 것을 집필하고 썼을지 모르겠지만 그 손을 움직이시고 그 사람의 지, 정,의를
움직이셔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인격과 사랑과 시간과 문화 모든것을 통하여서 말씀을 이루시는데
거기에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하셨다.
여기서 책망은 꾸짖으신다 우리의 잘못된것을 고쳐주신다 라는 뜻이다.
우리는 포스트모던 문화에서 하나님의 말씀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는 말씀만 찾으려고 한다 하나님
말씀가운데는 진정한 위로와 회복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보게 하신다.
네가 정말로 낫고자 하느냐? 우리 그 말씀 보았다 회복과 고통 사이에 38년을.]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의 아픈 부분을 보게 하시고 상처를 보게 하시는 진정한 위로는 그 상처가
치료될때만 일어나는것이다.
진정한 사망의 권세를 생명으로 옮기는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만 나타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하는 말씀은 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 속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먼저 그 말씀앞에 죽어야 새로운 생명에서 에덴에서 나를 창조하신 그 모습으로 다시 창조되는것이다.
그리고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화의 과정을 이야기 하시는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계속 자라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이야기 했다.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에 충분히 유익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영적인 군사로 만들기에
차고 넘치는 능력이 있는줄로 믿는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3가지 적용점을 말하자면
1.하나님의 말씀이 검에 비유된 의미를 늘 묵상하라. (하나님의 말씀이 왜 검에 비우되었는지 묵상하라)
진짜 하나님의 성숙한 사람들이나 놀라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훈련해야 된다는 것을 이 검의
활용법에 대해 우리가 보는 것이다. 어설픈 무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막 휘두른다. 말씀을 가지고 막
휘두르면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고 자기 가족들에게도 상처를 주는것이다. 말씀을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데
사용되는것을 생각을 안하고 다른 사람들을 찌르는데 사용을 한다면 말씀은 사탄을 찌르는 것이다.
유혹은 피하고 사탄은 대적하고 찌르고 하는것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뜻과 생각을 감찰한다고 하였는데 이 감찰한다는 뜻은 judges는 판단한다는 뜻이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판단)하나니 (it judges the thoughts and attitudes of the heart)" 우리는
우리말과 능력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더 신뢰해야 한다.
말씀에는 능력이 있고 힘이 있고 말씀에는 마음이 상한자들을 향한 은혜가 있고 죄인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있고
강팍한 마음을 변화시키는 사랑이 있다. 그래서 본질적인 의미에서 말씀 묵상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새벽말씀 목사들이 열심히 말씀 올리시는데 우리 지구촌교회 싸이즈에 비해 적게 들어가시는것 같다.
이런 말씀 처음 드리는건데 창피한 것이다. 말씀 묵상 다 한다고 하는데 새벽마다 목사님들이 말씀묵상 다
올려놓는데 그 말씀을 보지 않는다. 가이드라인을 보지 않는다 같이 은혜를 나누지 않는다 기도하지 않는다.
문제가 있는것이다. 새벽 제단에 그 시간에 나올수 는 없지만 좀더 시간이 지나 8시나 9시에 말씀묵상
목회자들이 준비한 말씀보고 내가 말씀 묵상한것을 온전하게 해석을 하게되고 온전하게 적용을 하고 있는것인가
같이 한번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한 것이다. 새벽교회 말씀묵상 철저하게 하시길 주님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말씀의 본질을 늘 연구하고 배우라.
구체적으로 말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말씀 활용법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핸드폰 사용법은 잘 알지만
말씀 활용법을 아십니까?
우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신앙의 기초인 말씀을 너무 읽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이단의 타깃이다.
딱 내가 보고 싶은 말씀만 취사 선택하는것 정말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서 말씀을 봤다.
이제 어려운 딱딱한 말씀도 우리 지구촌교회에서는 배울 수 있고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이단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조를 전하기 위해 그 부분들을 달달 외우고 다닌다. 우리는 그런 도전으로 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본적인 성경 지식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성경읽기 운동 내년초부터 계획하고 있다.
정말 말씀의 본질을 알고 통독 하면서도 그 의미를 알고 그리고 어떻게 그 말씀을 활용해야 되는지배워야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는 수법을 쓰지 않고, 왜곡하는 수법을 쓴다. 포스트모던 문화 특징가운데 하나이다.
반대정면으로 돌파하려하지 않고 왜곡하는 수법을 쓴다. 창세기부터 나타났다.정말 따먹지 말라고 했느냐,광야에서는
정말 가나안땅을 주신다고 했느냐, 정말 메시야가 온다고 했느냐?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파악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3.말씀에 검 앞에 먼저 순복함으로 사탄을 대적하라.
사탄을 이기는 방법 말씀은 검에 비유되었지만 사실은 말씀은 내가 부리는 종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들고 있는 이 말씀의 검은 내가 부리는 막대기가 아니라 내가 부리는 종이 아니라 사실은 그 말씀의 검이
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함부러 휘두르는것이 아니라 먼저 그 말씀앞에 내가 순복하고 겸손히 엎드러져야 비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삶 가운데 나타나고 늘~그 능력을 맛볼때도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검이 성령의 능력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을
고백해서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앞에 올려 드려야 한다.그럴 수 록 내가 갖고 있는 검의 성령의 능력은 더욱 더 커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때 다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탄이 주는 3가지 시험이
다 포스트모던의 시험이다.
광야에서 받은 이 시험을 말씀으로 웅변을하셨다 40일을 금식하고 굶주리고 완전 금식한 상태에서 사탄이 주는
유혹이라는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비록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육신의 한계를 입고 계셨기에 손하나만
까딱해도 한번만 눈을 깜빡하셨어도 칼을 뺐다 넣는 시늉만 하셨어도 사탄들은 다 쓰러졌을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것을 말씀으로 대항을 하셨다. 그 말씀들이 대부분 구약에서 나오는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것은 우리가 따를 수 있는 모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예수님이 당하신 위기 앞에서 사람들은 돌을 들어서 예수님을 죽일려고 하였고 절벽 끝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아직 임하지 않아서 당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실제 그런 모욕과 어려움을 당하셨을 때에도 예수님은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다 왜 일까? 인간적인 육신적인 한계를 입고 있는 우리 인간이 이땅에서 살면서 우리 죄때문에 당하는 고난
허물 그런것이 아니더라도 선한 싸움을 싸우는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 특별히 영적전쟁가 운데에서 우리가
따를 수 있는 그 모범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드라도 순종함을 배워서 히브리서 말씀처럼 우리에게 보여주신것이다.
그만큼 말씀에 능력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 결정체가 바로 부활인 것이다.
그 모든것을 이미 승리하시고 이기셨다라는 것을 통하여서 영적전쟁에 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위로하시고자
말씀으로 우리에게 격려하시고 그 모든것을 이미 이기셨다라는것을 십자가 상에서 부활하심으로 보여주신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시고 늘~구원을 확신하시고 이제 이제부터 말씀의 검을 드시고
먼저 그 말씀을 대면할때 마다 내가 죽고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한번 나를 새롭게 하실때 말씀의 검을 나에게 들려
주실때 그 말씀의 검을 가지고 다른사람들을 살리고 사탄을 대적하는 놀라운 능력이 여러분들과 또 우리
지구촌교회의 공동체와 선교사님들에게 또 이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분들에게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신앙생활을 하는동안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를 정죄할 것입니다. 별거 아니야 너는 구원받은 백성이 아니야
라고 우리의 머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가슴을 공격할 것입니다 너는 결코 의롭지 않아.
오늘 주신 말씀은 구원의 투구로 우리 머리를 감싸라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처럼 믿음의 호신경으로 우리의 가슴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나의 백성 나의 자녀야
내가 너를 한번 선택한 것은 변하지 않아 우리는 이제 사탄을 대적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듭니다.
그러나 이것을 함부러 휘두르는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 말씀앞에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그거 잘못된거야.
그거 죄야 회개하렴 내 아들아 내 딸아 말씀 하실때 순전하게 다 들어나는 모습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다시 구원의 투구로 씌워 주시고 진리의 허리띠를 차게 하시고 평화의 신발을 신게 하시고
믿음의 방패를 들게 하시고 의의 호신경으로 둘러싸게 하시고 말씀의 검을 우리에게 쥐어 주십니다.
특히 우리가 세상을 향해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영적 전쟁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기독교 학교들이 사학법에 의해서 세상에 좌우되지 않도록 기독교 학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잘 양성할 수 있도록 반 성경적인 것들이 제정되지 않도록 코로나가 속히 그치게 하시고 코로나로
고통받는 모든이들을 위로하시고 평안을 주실 수 있도록 말씀의 검을 가지고 기도의 능력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코로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의료진들을 위해 정치지도자들이 모든 결정을 잘 해주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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